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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남수문 복원 下

 

90년 만에 복원되는 남수문은 수원천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데 하천의 폭과 깊이의 변화가 심해 서로 어울리지 않게 됐다. 남수문의 복원설계 과정에서 수문의 하부구조는 창건 시기가 아니라 순조 때 중창된 구조를 기준으로 했다는 아쉬움을 전편에서 이야기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남수문 남서쪽 구역의 복원이 더딘 이유와 남수문 공사에서 드러난 문제와 원형이 변형된 부분에 대해 알아보자.

수원화성 동성의 북쪽은 이어져 있으나 남쪽은 동북각루를 거쳐 산을 내려와 남수문에서 끝나고 있다. 원래는 남수문에서 남공심돈(南空心墩)과 남암문(南暗門)을 거쳐 팔달문으로 성곽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데 현재 상업 건물들이 들어앉아 있어 그 흔적조차도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남공심돈은 남수문의 입구에서 위치하여 남수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으며 두 시설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었다.

남공심돈은 1930년 7월 12일 붕괴되고 주변 성곽은 이전부터 주변 상업 활성화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지역의 복원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968년 12월 4일 성곽과 그 주변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한다.

당시 팔달문 주변 성곽은 이미 없어지고 상가들이 성업 중이었다. 당연히 건물 주인들은 수원시청을 통해 문화공보부에 해제 관련 진정서를 제출하기 시작하였다. 수원시청 역시 주변 경제 침체를 원인으로 같은 의견을 내고 문화공보부는 팔달문 주변 일부를 문화재 보호구역에서 해제시켜줌으로써 1970년 수원성복원사업에서 팔달문 주변은 제외됐다.

남수문 복원공사에서 나타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백화(白花, 외벽에 백색의 물질이 발생)현상이 심해 외관상 좋게 보이지 않는 문제다. 백화현상은 복원공사가 끝나자마자 시작되었고 바로 보수공사를 하였지만, 여전히 백화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보통 벽돌 벽체의 백화현상은 벽돌을 쌓기 위한 몰탈(mortal)의 재료에 염분을 함유한 바닷모래를 사용했을 때 가장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남수문 복원공사에 바닷모래가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바닷모래의 사용을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였다고 해도 법적 문제는 없다. 하지만, 현재 흉하게 보이는 백화현상은 문제가 맞다. 둘째, 수문 하부의 홍예에 연결된 무사석 형태에 대한 문제이다. 홍예는 원형이기 때문에 옆에 있는 무사석과 직각으로 접합될 수 없어 홍예 상부로 갈수록 무사석의 삼각형도 예각이 된다.

홍예 종석(宗石, 최상부 돌)위에 있는 부형무사(缶形武砂, 하부를 장구 모양으로 판 돌)를 얹는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없으나 부형무사 양옆에 있는 무사석 형태가 방형(方形)에 하부의 일부가 돌출 됐다는 점이다. 이런 가공형태는 동아시아 보다는 유럽의 유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이런 형태로 가공하려면 더 큰 돌에서 많은 부분을 현장에서 떼어내어야 하는데, 기계를 사용하는 지금과 달리 손으로만 작업하는 당시에는 쉽지 않은 방식이다.

물론 이런 양식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아래 무사석이 긴 예각 되어 그 부분이 쉽게 부서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추후 발생할 하자부분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개선된 양식을 사용하고자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변경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화재 복원을 경제 원리에 의해 튼튼한 구조로 변경해버리면 강아지 대신 인형을 키우는 것과 다른 것이 없지 않은가. 남수문의 석조양식은 창건기의 양식과 달리 튼튼함을 위해 홍예구조의 방식과 무사석의 형태가 달라졌는데 언젠가는 바로 잡을 날이 오길 바란다.

남수문은 우리나라 수문 중 가장 우수한 방어력과 가장 많은 홍예를 가지고 있다. 수원화성의 시설 중 가장 근래에 복원된 것으로 1970년대 복원 때와 달리 여건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시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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