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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때 광복군 투신 평생을 군인으로 남북통일 보는 것이 생애 남은 꿈

안양 호계동 김 국 주 지사

1924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징병 피해 상해로
장조민 선생 만나 광복군 길로… 초모위원회 참여

해방 후 김학교 장군 권유로 육사 특별반 입대
한국전 참전했으나 고향 땅 밟지도 못하고 후퇴
1979년 예편… 건국포장·건국훈장 애국장 받아

전역 후 광복회 회장·독립유공자협회장 등 수행
독립운동가·참전용사 복지·권익신장 위해 활동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 낭독을 시작으로 전국에서는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의 독립을 이루자는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만세운동은 일제의 총칼 아래 침묵했던 애국지사들의 깊은 잠을 깨웠다.

독립을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몰려든 지사들은 임시정부를 세워 외교적 독립운동을 펼쳤고, 일제의 무력에 맞서기 위한 항일무장단도 속속 구성됐다.

많은 독립운동가 가운데 현재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 34명 중 경기지역에 8명이 거주하면서 그날의 함성을 온몸으로 생생이 증언하고 있다.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경기지역에 생존해 계신 애국지사 다섯 분을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안양 호계동에 거주하는 김국주 애국지사는 192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해 20살 되던 1943년 10월 광복군으로 참여했다.

일제와 싸우며 만주를 뛰어다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뒤로, 지금은 건강으로 인해 오랫동안 서 있거나 걷지를 못하지만 나라에 대한 걱정은 젊은이 못지 않게 열정적인 그다.

원적은 경북 의성인데, 한의사였던 부친은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등을 옮겨 다녔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을 따라 북만주 목단강으로 이주한 김 지사는 당시 용정에 위치한 상급학교에 진학을 하려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좌절됐다.

1942년 일제의 징병을 피해 상해로 떠난 김 지사는 북경에서 산서성 석가장으로, 다시 서주를 지나 귀덕에 도착해 일을 하며 독립군에 갈 여비를 준비하던 중 장조민이란 분을 만났다.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하다 중경에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립군을 찾아 가던 중이던 장 선생을 만난 김 지사는 “내가 갈 길이 이거다”라는 결심이 서자 곧 중경으로 향했다.

도중에 도착한 부양에서 김학규 장군과 오광심 여사를 만나 광복군 제3지대의 전신인 광복군 초모위원회에 참여했다.

초모위원회는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할 동지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일본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활동해야 했다.

김 지사는 1944년에는 서주(徐州)지역에 파견돼 기간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입대자를 모집하는 초모(招募)공작을 전개했고, 서주지역 공작에서 철수한 뒤에는 중국군 제10전구산하 간부훈련학교 특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았다.

다음 해인 1945년 1월 안휘성(安徽省) 일대 하류지구 연락책임자로 임명돼 독립운동가들의 안내와 지하공작 거점확보를 위해 노력했으며, 같은해 8월 반부지구 군사 특파단장 및 광복군 제3지대 제2지구대장으로 활동하며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해방 후 1946년 6월에 인천으로 귀국한 김 애국지사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하던 한미호텔에서 생활을 하던 중 만주에서 귀국한 김학교 장군의 권유로 육사 특별반으로 들어갔다. 당시 광복군들은 “미국을 위한 용병은 되지 않겠다”며 군 입대를 거부했지만, 김 지사 입대를 계기로 많은 광복군이 군에 들어갔다.

소위로 임관했던 김 지사는 당시 부패한 군대 상황을 비판하며 상부에 바른 말을 하다가 밉보여 ‘여순반란사건’에 동원 됐다. 그곳에서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돼 있던 중 한국전쟁을 맞았다.

중대장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선생은 병력을 이끌고 가장 먼저 평양에 들어갔고, 이후 고향인 원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눈앞에 원산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후퇴해야 했다.

 

 

 

 

전쟁 이후 계속 군인의 길을 걸은 김국주 애국지사는 36사단장과 제1군수지원사령관, 1군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197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나라를 위한 삶에 헌신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가리기 위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김 지사는 전역 후 광복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평생동안 ‘조국’을 가슴에 담고 살았다. 광복군 동지회장,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감사,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와 참전용사의 복지와 권익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김국주 애국지사는 현재 안양의 한 아파트에서 배우자인 조현실 여사와 함께 살고 있다.

고령이지만 큰 질병이 없이 거동이 양호하지만 세월은 열혈 독립운동가의 기력도 조금씩 줄어들게 만들어 청각기능이 떨어지고, 오랜시간 걷기 힘들다보니 요즘은 거의 집에만 머물고 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독립군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늘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며 살았다는 김 지사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던 것은 ‘조국’이라는 마음이 늘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지사는 “요즘 한반도 정세가 나아지려고 하는 점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며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정신을 바로 갖고 살아야 하며,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받친 애국지사의 후손들도 잊지 말고 우리사회가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애국지사들의 후손이 대접을 받아야 많은 사람들이 나라와 민족을 버리지 않고,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헌신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김국주 애국지사는 “생전에 남북통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가꿔진 우리나라를 위해 보다 애국의 마음을 갖고 생활해 주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용각기자 k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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