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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물러났지만…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은 언제 가볼까

군포 거주 김 유 길 지사

1919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출생
학도병으로 中 강소성으로 끌려가
“日 위해 살 수 없다” 목숨 건 탈출
장준하·김준엽과 중경 임정 도착
광복군 2지대 자원 침투훈련 받아
한국전쟁땐 미군 측 통역으로 활동

 

 

 

군포에 거주하는 김유길 애국지사가 태어난 해는 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평안남도 평원서 출생한 김 지사는 12세에 보통학교에 입학해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곧장 일본 유학의 길을 선택했다.

일본 대분고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 물자와 군인 등 모든 것이 막바지로 몰린 일제는 그를 학도병으로 징집해 중국 강소성에 있던 제7997부대로 끌고 갔다.

김 지사는 “나라를 위해서 살아도 부족한 마당에, 일본을 위해 살수는 없다”며 다른 학도병들과 함께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 그 길로 중국 안휘성 임천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에 입대했다.

훈련은 고됐다. 무엇보다 먹을 것이 적은 상황이었지만, 독립을 이루겠다는 학도병들의 의지는 배고픔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생은 하루에 두끼 보급되는 죽으로 배를 채우면서 ‘독립’을 염원하며 한광반에서 훈련을 마치고, 장준하, 김준엽 등 다른 학도병과 함께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중경까지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제일 문제는 중경까지 가는데 필요한 음식 등을 구할 돈이었다.

일행은 중국 중앙군을 찾아 ‘광명의 길(光明之路)’이라는 공연을 준비했다. 김준엽 선생이 시나리오를 쓰고, 장준하 선생이 연출했다.

일제의 탄압 아래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된 한국 청년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해 독립운동군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본 중국인들이 감동을 받아 아낌없이 성금을 냈고, 그 돈으로 중경까지 갈 자금을 만들 수 있었다.

중경을 가려면 제비도 넘기 힘들다는 파촉령을 걸어서 넘어야 했다. 험난한 산세도 힘들었지만, 추위도 문제였다. 선생은 “차라리 그냥 여기서 죽어버리고 싶은 정도로 힘들게” 행군을 이어갔다. 잠을 잘 때면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면 천신만고 끝에 15일을 걸어 파촉령을 넘어 파동에 도착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중경으로 가는 배를 타려했지만 중국인 선장이 탑승을 거부했다. 선생과 동지들은 배가 출항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가 막 출항하는 순간에 배에 뛰어 올라 끌어내리려는 선원들과 몸 싸움을 하며 버텼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우리가 못할게 뭐가 있어. 막무가내로 버텼지.”

다행히 선생 일행은 배에 타고 있던 중국군 장성의 도움으로 중경까지 배를 타고 갈 수 있었단다.

천신만고 끝에 중경에 도착해 김구 선생을 만났다. “학도병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며 격려해 주던 모습에서 모든 피로를 잊었다”는 김유길 지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울던 임정요인들의 눈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임정에 도착한 김 지사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미국 OSS와 합작해 한반도로 침투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부대에 자원했다. 1945년 4월 29일이었다.

무전통신반에 배속돼 국내 팀투 훈련을 받으며 조국으로 진입 명령을 기다리던 중 8월 10일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기분은 기쁨이 아니라 허탈이었다고 그는 전한다.

“죽을 각오를 하고 그 힘든 훈련을 받았는데, 국내 진공작전도 펼쳐보지 못하고 일본이 항복했다니 허탈할 수 밖에.”

 

 

 

 

일본의 항복에 전쟁이 끝났다며 기뻐하던 미군과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내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한” 분한 마음을 삭혀야 했다. 우리 광복군의 역할 없이 일제가 항복했기 때문에 국제무대에서 대한민국의 발언권은 약할 수 밖에 없고, 그에따른 정부 수립도 험난할 것이라는 것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갑작스런 해방을 맞은 선생은 상해에서 반년 정도 머물다가 귀국했지만 좌우익으로 갈라진 국내 상황은 또다른 절망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미국으로 가 공부를 하자”고 생각한 선생은 유학을 위해 잠시 수원에 머물면서 교편을 잡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선생은 미군 측 통역으로 입대해 활동하다가 정전협정 이후 ‘평범한’ 직장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미국행을 결심,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노년을 조국에서 살고 싶었던 선생은 1995년 귀국해 광복회 부회장,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하지만 늘 가슴에 맺힌 한이 있다.

“어릴 땐 왜적만 없어지면 좋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고향인 북한은 못가는” 상황이 늘 마음에 상처로 나았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을 고향이지만, 그래도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이나 을밀대, 산천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는 선생은 “다리에 부종이 심해 오래 걷지는 못하지만 갈수만 있다면 꼭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유길 지사는 이런 공적이 인정돼 1980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격상됐다. 늦은 감이 있지만 “훈장을 바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잊지 않아준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김 지사다.

김 지사는 지난 2014년 5월 중국 섬서성 시안시를 찾았다. 그곳 기념공원에서 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 제막식이 열렸다.

“내 힘으로 나라를 찾겠다던 동지들과 의지를 불태우던 그곳에 마련된 표지석”을 어루만지는 사진을 보여주는 김유길 지사의 손끝이 떨렸다. “먼저 떠난 동지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김유길 지사의 마음이 전해졌다. /김용각기자 k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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