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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둘도 나라 사랑… 남북 싸우지 말고 단결해야 강해져

수원 장안구 거주 이 영 수 지사

1924년 경북 고령군 운수면 출생
10대 후반 일본인 가게서 일하며
독립운동가 정보통으로 첩보활동

1943년 광복군 제3지대 입대
군자금 모금·군수품 이동 등 담당
한국전쟁 발발시 국군으로 지원
대한민국 위해 평생 군인의 길 걸어

 

 

 

수원 장안구에 거주하는 이영수 애국지사는 1924년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1943년 광복군 제3지대 입대해 병사 모집 활동 및 5전구(五戰區) 사령부 관할지로 특파돼 유격전을 전개했고 1944년 10월 광복군 제3지대 입대해 군자금 전달 및 학도병 귀순 공작 활동을 했다.

1944년 12월에는 왜군 소속으로 있었던 경력을 활용해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 초모 공작 사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던 중 1945년 5월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한국으로 압송되던 도중 구방자역(溝邦子驛)에서 탈출한 뒤 금주성(錦州省) 전장태(田莊台)에서 피신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이후 신의주로 귀국한 뒤 공산당의 눈을 피해 서울 해방촌에 정착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해 국군으로 지원한 이 애국지사는 전쟁이 끝낸 후에도 의무하사관으로 군에 입대해 대위로 전역할 때까지 평생을 나라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이 지사는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게 됐다.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와 형님이 일본놈들에게 총을 맞고 돌아가셨는데 내 마음이 어땠겠어..”라며 “당시 어머니와 같이 살면서 어렸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크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던 곳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에서 중국인들과 자연스레 섞여 살다 보니 중국어는 물론이고 일본어도 능숙하게 다뤘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어가 참 중요한 것 같다”며 “당시 일본말과 중국말을 했기 때문에 이만큼 산 것 같다”고 말한다.

 

 

 

 

10대 후반에는 중국 내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정보통으로 활동했다는 이 지사는 “일본말을 잘 해 가게 주인이 굉장히 좋아했고, 일본 군인들은 내가 첩자인 줄 모르고 군사 기밀사항도 내 앞에서 서로 거리낌없이 했었다”며 “대화를 귀담아 듣고 가끔씩 가게에 들리는 독립군들에게 전해주는 첩보활동을 했는데, 예를 들면 ‘일본 군대가 언제 어떻게 움직인다고 하니 피하라’는 내용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오늘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내일 중국에서 토벌을 나간다거나 일본 군대가 출동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을 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이 정보들이 독립운동에 있어 굉장한 도움이 된 것 같다”며 “한국인들도 가끔 오곤 했는데 처음엔 독립군인지 몰랐지만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독립운동가였다. 그들도 내가 한국 사람인 줄 알고 난 뒤부터 가깝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영수 지사는 김구 주석의 휘하 조직에 소속돼 수많은 어려움과 생사의 길을 넘나들며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과 군수품 이동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 중국에는 바퀴 하나 달린 구루마가 있었다. 구루마에 군자금과 권총, 카메라 등을 싣고 목적지에 전달했는데 들키면 위험하기 때문에 채소와 옷 등으로 위장하고 다녔다”며 “또 움직이면 수레에서 ‘덜컥덜컥’ 소리가 나 주로 밤에 산길과 들길로 이동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놈들은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뺏기 위해 따라다니며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야밤에 같이 이동하던 동료 한 명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빈 몸이어서 다행히 살아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다”고 밝혔다.

일본놈들의 감시를 피해 숨어다니며 군자금을 얻으러 다녔지만 총을 비롯한 무기 등은 들고 다니면 독립군인 것이 티가 나 구하기도 어려웠다.

이 지사는 “당시 중국 사람들이 아편 장사를 많이 했는데 일본군에게 걸려서 ‘너 뭐야, 조센징인데! 뭐하는 놈이야’라고 하면 아편 장사하는 중국인 행세를 해 위기를 벗어난 적도 있었다”며 “일본은 그냥 적이다. 아직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사과도 없고,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는 그 양반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일본이 모르는 척 방관할 때마다 너희 딸들 데려다 똑같이 해볼께 바꿔보자 말하고 싶다”고 분노했다.

근·현대사를 모두 경험한 그는 이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올해로 96세인 이영수 지사는 수원 장안구의 한 아파트에서 배우자인 홍봉옥 여사, 슬하에 둔 아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의사소통도 가능하고 큰 질병은 없지만 무릎이 좋지 않아 지팡이나 부축에 의지해야 거동이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장거리 활동은 어려운 상태로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 나라 없는 설움을 받고 자란 이영수 선생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하나도 둘도 나라 사랑이다. 우리를 해롭게 만드는 것은 분열이기 때문에 강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며 “남이다 북이다 싸우지 말고 단결로 나아가야 하며, 일본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강해지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영수 애국지사는 “나라가 있어야 국민이 있다.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6·25전쟁 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라는 있을 수 없다”며 “나라를 위해 일한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용각기자 ky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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