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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말에도 씨가 있다

 

그냥 술 한 잔 마시면서 친한 사이니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주고 받는다. 그냥 주고받은 말인데 왠지 가슴이 찜찜하다. 아니지. 농담으로 한 말을…. 자신을 다스리려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나오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 인간 말 속에 씨가 들어 있는 것 같다. 그냥 술기운에 한 말이 아닌 거 같다. 괜히 괘씸하다. 꾹 눌리려고 하니 이게 더더욱 선명하게 가슴에 자리 잡는다.

일을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꾸 그 말이 귓속에 남는다. 이쯤 되면 말이 가슴이라는 텃밭에 씨를 내린 것이다. 씨는 시간이 가면 움을 튼다. 한 번 움을 터서 고개를 내밀면 잘 자란다. 마음이라는 토양은 하도 간사해서 거기에 한 번 꽂히면 빼낼 수가 없다.

밥숟가락을 들면서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농담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게 진담이다. 속이 바글바글 끓는다. 언중유골이라, 말 속에 뼈가 있다. 그 뼈에 살이 붙고 핏줄이 돈다. 이쯤 되면 말씨는 더더욱 기운을 받아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그 인간이 그랬구나. 평소 소행으로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다. 괘씸하기 그지없고 서운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이제는 믿지를 못하겠다. 원한에 배신감에 마음이 널뛰기를 한다.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몸은 점점 불 꺼진 터널 같은 어둠의 수렁으로 빠져 든다.

갖가지 생각이 안개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감기 몸살기운까지 덮친다. 몸이 괴로우니 마음은 더욱 심란하다. 개 같은 인간, 그 인간이 뭣이라고 나를 이렇게 짓밟아….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들끓는 증오심이 전신을 욱신거리게 만든다. 날이 새면 병원부터 찾아야겠다. 그 인간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선잠이 들었다가 퍼뜩 깨어난다. 자야지 하면서도 몽중에도 그 생각이 떨어지지 않는다. 잤다가 깼다가, 깼다가 잤다가 날밤을 세운다.

이미 마음속의 말씨는 싹을 트고 줄기를 뻗어 단단히 자리 잡았다. 한번 뿌리를 뻗은 말씨는 인력으로 지울 수가 없다. 그새 날이 샜다. 몸은 일으켜야 하는데 몸뚱이는 천근이다. 끙,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간다. 불을 켜고 거울 속에 비췬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푸시시한 얼굴에 주름살이 자글자글하다. 그 인간 때문에, 그 말 한 마디에, 폭싹 늙은 것 같다.

그래도 출근길에 올라야 한다. 한기에 오싹오싹 전신이 쑤시고 어지럽다. 그래도 한 숟가락 먹어야 한다. 밥을 먹어도 쓰디 쓴 배신감이 모래알 같이 씹힌다.

마음이 어지러우니 몸은 더더욱 쑤시고 아프다. 그 위에 현기증이 돌아 어지럽다. 잠시 멀어졌던 감기몸살이 또 다시 살아났다. 죽을 지경이다. 한시도 말끔할 때가 없다.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난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일도 신경을 곤두세워 나도 모르게 언성이 날카로워진다.

그 놈의 말 씨 하나가 가슴 속에 우뚝 선 소나무처럼 박혀 있다. 누가 뭐래도 한번 솟은 나무는 흔들리지가 않는다. 번뇌라는 나무가 바위처럼 육신을 짓누른다.

사람은 이렇게 주고받은 말 한 마디로 부대끼며 일생을 살아가다가 그걸 깨닫는 순간 죽는다. 그러니 인간이야말로 얼마나 나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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