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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뭉크의 일관된 예술관

 

1985∼86년 작 ‘병든 아이’는 뭉크의 초창기 작품이다. 침상에 앉아 있는 소녀에게 생명은 단 한 줌만이 남겨진 듯 하고, 이제 그마저도 곧 빠져나가버릴 듯하다. 어미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소녀를 미처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다.

이 작품에는 뭉크의 불우한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6살이 되던 해 그의 어머니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몇 년 뒤 큰 누이 역시 결핵으로 죽었다. 이후에도 지독한 병마는 그의 가정을 끈질기게 괴롭혀서 여동생과 남동생 역시 머지않아 세상을 떴고, 뭉크 역시 결핵과 독감으로 앓는 날이 많았다.

촉망 받는 젊은 화가였던 에드바르드 뭉크는 이 작품을 발표하자마자 잔인한 혹평을 감내해야 했다. 사람들은 질병과 우울감 그 자체였던 이 작품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떤 비평가는 이 천재 화가가 곧 스스로 파멸해 버릴지도 모른다며 애석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을 벗어나 이 작품의 주제는 거듭 재평가를 받았으며, 뭉크는 이후에도 같은 주제의 작품들을 여러 점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처음 완성된 버전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뭉크는 이 작품을 죽기 전까지 소장하고 있었다 한다.

한편 이 작품에 쏟아졌던 거센 비난은 뭉크의 예술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 같다. 뭉크는 이후에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삶을 주제로 한 그림을 지속적으로 그려나갔다. 그는 어록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관을 많이 남겼던 화가이기도 하다. “자신을 드러내려는 마음의 충동에 못 이겨 그려낸 예술이 아니라면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문학과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심장의 피로써 창조된 것임에 틀림없다. 예술은 곧 한 인간의 심혈이다.”

에드바르드 뭉크의 생애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라운 점은 비극의 주인공이자, 육체적, 정신적으로 심약했던 그가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서는 추호의 흔들림 없이 초지일관 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거센 비난 속에서도, 비평가와 동료 화가들의 혹평 속에서도 그의 방향타는 늘 고정되어 있어서, 어쩌면 그는 심약한 인격이 아닌 진정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런 그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모국 노르웨이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열병처럼 들끓었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 운동이었다.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 운동은 1885년 젊은이들, 대학생, 예술가, 지식인들이 가담했던 무정부주의, 반시민 운동으로서, 기성세대가 형성해 놓은 종교관과 사회질서로 인해 짓눌렸던 젊은이들의 욕구가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들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억누르는 사회질서를 전복시키고자 하였으며 성의 평등과 자유연애, 가부장적 체제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뭉크의 예술적 스승과도 같았던 크로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던 소설가 한스 예거 역시 이 운동에 동참했었다.

이 운동은 자기 내면의 고통 말고는 다른 것을 그리는데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뭉크의 예술적 욕구에 큰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병든 소녀’는 바로 이 시기에 완성됐다.

사실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아 운동은 단순히 여성과 성욕구의 해방을 추구한 운동이 아니었으며, 자유를 얻기 위해서라면 자기 파괴를 감수해야한다고 촉구했던, 어느 정도는 비이성인 측면을 지녔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최했던 집단의 강령 중에서는 ‘부모를 박대하라’, ‘자살하라’와 같이 잔혹한 것들도 있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움틀거리는 강력한 무엇인가를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서라도 해방시키고자 했다.

인간의 병적 심리가 체계적으로 학문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자기 내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그토록 처절하게 던지고 있었다. 뭉크 역시 아버지의 깊은 신앙심이 그의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런 아버지와 자주 충돌했었다.

하지만 가정을 파괴하라든지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강령에는 전혀 동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충실히 기술하라’ 이 운동의 제 일의 강령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자기만의 견고한 예술관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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