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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원더풀 데이즈

 

볼을 감싸는 추위, 피어오르는 뽀얀 입김과 집으로 들어설 때의 따뜻한 열기까지. 겨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설렘이 있기에 겨울을 사랑했다. 그리고 겨울을 사랑하는 만큼, 따스한 바람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대지 위에 차례로 피어나는 꽃들과 풀벌레. 바깥나들이로 나를 유혹하는 화창한 봄날을 사랑하기에, 아쉽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겨울을 배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봄은 예년처럼 반갑지가 않다. 피부에 발자국을 내며 걸어 들어오는 봄의 숨결은 언제나처럼 뚜렷하게 계절의 변화를 속삭이지만, 뿌연 하늘의 먼지들이 늘 설레던 계절의 경계마저 희미하게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미세먼지’와 그보다 더 작다는 뜻으로 ‘초 미세먼지’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저 멀리 성벽을 넘어 침략해 들어오는 대군(大群)의 위용처럼, 단단하게 뭉쳐진 그들은 분명 그들 고유의 회색빛을 세상에 드러내며 푸른 하늘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 이다지도 아득하게 몰려들었을까. 그 출처는 이미 심증과 물증에 범벅이 되어 지저분한 진흙만을 튀기고, 정체모를 대군의 인해전술 앞에 지휘관들은 속수무책. 우리를 이끌어줄 선봉장의 깃발도, 멀리서 솟아오를 봉화(烽火)의 씨앗도 보이지 않는 혼탁한 미세먼지의 바다. 질곡의 우리 역사 속 고비마다 등장하는 ‘갈 곳을 잃은 민초’의 슬픈 아리랑이 지금 또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이번 전장에서도 우리 가냘플 민초들에겐 제대로 된 무기도 갑옷도 주어지지 않았다. 국경조차 무색케 할 대군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아이처럼 허둥대며 ‘공기청정기’라는 방패를 더듬어본다.

첨단 기술이 녹아있다지만 어디까지 날 지켜줄지 모를 작은 상자 뒤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행주치마를 꼭 닮은 손바닥 마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뿌연 적들의 바다 한가운데로 충혈된 눈을 비비며 오늘도 내일도 가냘픈 몸을 던지고 있다.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함이 분명하지만 나가지 않을 수 없어 우리는 일찌감치 점령된 거리로 나가야 한다.

“저 고등학생일 때 ‘원더풀 데이즈’라는 한국 SF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어요. 조금은 특이했던 제목에는 나름의 의미가 담겨있었어요. 오염되어버린 한국의 미래에 언제나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 사이로 일 년에 한두 번 잠깐 파란 하늘이 보이는 날이 있는데, 바로 그 날을 ‘원더풀 데이즈’라고 부른다는 뜻이었지요. 영화를 볼 때는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두려워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함께 시를 공부하는 젊은 학생의 울적한 표정과 목소리. 내 젊은 날의 화창한 봄 하늘을 이 친구는 그대로 공유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자라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이 젊은 친구 또한 ‘그래도 가끔이나마 푸른 하늘을 본 적이 있는’ 혜택 받은 어른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는 씁쓸한 상상이 나를 더욱 짓누른다. 가슴 위에 얹어지는 무게에 무릎이 꺾이는 것을 느끼며,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버텨볼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읊조려 본다.

“원더풀 데이즈”. 숨이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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