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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서북각루(西北角樓)

 

각루의 개념이 수원화성에 도입된 것은 축성(築城)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성 1차 공사 때 완성된 시설 중 이름이 없던 북문 등 중요건물은 을묘년 행차 직전인 1795년 2월 22일에 이름이 붙는다. 하지만, 이때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은 이미 완성되었지만, 을묘년 행차 때 만든 성조도(城操圖, 훈련도)에는 용두정(龍頭亭)으로 표시되어 방화수류정이나 각루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후에 지어진 세 각루 중 첫 번째로 완성된 서북각루는 화서문 서쪽의 팔달산 중턱에 2층 건물로 세워졌다. 지형도 높고 더해서 2층 누각으로 여기서 바라보면 만석거(萬石渠)와 대유둔(大有屯)을 넘어 멀리 지지대 언덕까지 보였다. 정조가 여기서 황무지 위에 만들어진 옥토 대유둔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뜨겁고 자랑스러웠을지 상상이 된다.

서북각루 위치는 팔달산 북쪽 중턱으로 서성(西城)과 북성(北城)이 교차하는 모퉁이라는 지정학적 의미가 있지만, 실제는 직각이 아닌 사선으로 되어있다. 동쪽 화서문과 146보(약 170m), 서쪽 서일치(西一雉)와는 약 62m(기록은 70보(84m)) 떨어져 있다. 일반적으로 치성(雉城)간의 거리는 여장 50타(약 200m)를 기준으로 하여 화서문과 거리는 적당하나 서일치와의 거리는 너무 가까워 비합리적 배치이다.

서북각루의 배치가 치성간 거리가 비합리적으로 된 이유는 축선(軸線)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치성(雉城)은 보통 성곽에 직각으로 튀어나오는데 여기서는 사선으로 나와 있다. 치성의 바깥쪽 축선이 북성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아마도 이곳이 성곽의 모퉁이가 아닌 점을 보완하고 싶어서 만든 것처럼 보이다. 만약 서성과 북성의 연장선에 각루를 설치했다면 낮은 위치가 되어 멀리 볼 수 없고, 외부에서도 인지가 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위치를 조정함으로써 내부에서는 멀리 대유둔을 넘어 지지대 언덕까지 볼 수 있게 되었고 위계를 높이는 효과와 전략상 감시의 역할까지 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서북각루의 위치는 현지 지형과 실정을 고려한 합리적 정조의 건축이라 할 만 있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평면과 형태에서는 동남각루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서북각루의 평면을 보면, 정면은 2칸(間)으로 18척(5.54m)이고 측면은 2칸으로 22척(6.77m) 면적은 4칸으로 35.64㎡이다. 1층은 군인이 머물 수 있도록 벽돌로 만든 온돌방 1칸이 동남쪽에 있고 나머지 3칸은 봉당(封堂, 지붕은 있으나 방이나 온돌이 없는 흙바닥)이다. 2층은 계단으로 비어있는 서남쪽 1칸을 제외한 3칸은 마루가 깔려있다.

또 계단이 있는 면을 제외한 벽은 판문을 설치하고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었다. 목구조에서 특이점은 정주법(正柱法, 기둥을 빼지 않고 사방에 설치)으로 9개 기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같은 형태의 동남각루의 기둥이 7개인 점과 다르다. 기둥을 동남각루보다 2개나 더 설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층을 사용하는 면적은 4칸이 아닌 3칸으로 비합리적 계획을 하였다.

지붕 형태에서 보면 동남각루는 모임지붕(우진각)으로 하여 정방형을 나타내고 있지만, 서북각루는 팔작지붕으로 장방형의 의미가 커서 각루(십자각)의 의미는 찾아보기 힘들다.

복원은 1975년 수원성 복원정화사업 1단계 때 진행되었고 비용은 1,632만원이 들었다. 복원에 의문이 남는 것은 의궤에서는 소로(小累) 21개와 장여 1개 및 행공 4개가 있는데 현장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점이다. 소로는 장여 및 행공의 밑에 결합 되어 하부로 힘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 모든 부재는 보이지 않는다.

복원설계 당시 많은 고심이 있었겠지만, 문제점들을 해결하지 못해 아쉬운 점들이 보인다. 당시 건물을 아직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아 복원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해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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