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거꾸로 가는 계절
[생활에세이]거꾸로 가는 계절
  • 경기신문
  • 승인 2019.03.19 19:13
  • 댓글 0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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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윤 시인
정진윤 시인

 

어머니께서 김치를 덜어 주시는 양이 점점 줄어든다. 이건 김치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김치를 해야 한다는 무언의 신호다. 아니나 다를까, 김치 냉장고를 열어보니 김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김치 통은 이미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다.

마트에 배추를 주문하고 그 사이에 어머니 모시고 아침에 예약한 치과를 간다. 치과에는 벌써 대기 중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드디어 어머니 차례가 되어 간호사가 이름을 불러 진료실로 들어가시며 멈칫거리시며 뒤를 돌아보신다. 앉아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급적이면 어머니 잘 보이는 위치에 앉아 있다. 그래도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 따라 들어가 마취 주사 맞을 때 손을 잡아드리니 한결 마음이 놓이시는 듯하다. 마취가 되는 것 같아 다시 대기실로 나와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진료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린다. 남편의 호출이다. 부리나케 가게로 달려온다. 손님의 주문을 해 드리고 기왕 가게로 온 김에 배추를 다듬기 시작하는데 바람이 온갖 비닐이며 나뭇잎을 몰고 온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고 햇살이 좋아 마당에서 배추를 다듬기로 한 것이 착각이었다. 쓰레기에 먼지까지 나를 따라다닌다. 하는 수 없이 바람을 피해 안으로 끌고 들어갈까 하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 부지런히 다듬어 비닐로 대충 덮어 둔다. 절이는 건 어머니 진료 끝나면 모시고 와서 하면 되겠지 하며 치과로 향한다.

오늘따라 할 일도 많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잠시 앉아 커피라도 한 잔씩 하며 얘기를 나누고 앉으니 벌써 점심시간이다. 바람도 심한 날씨에 치과를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긴장하신 탓인지 자꾸 으스스하니 춥다고 하신다.

냉장고에 물에 담가 놓은 흰떡이 있기에 떡국을 끓인다. 어쩌다 세 알 남은 만두도 넣고 한 그릇에 한 개씩 담는다. 이렇게 한 개씩 나누면 반드시 한 개는 다시 돌아온다. 매운 것은 조금도 못 드시는 어머니께서 내 그릇으로 옮겨 주시면 못 이기는 척 맛있게 먹는다.

따뜻한 떡국 한 그릇에 커피까지 한 잔 하고 나니 몸이 풀리신다며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바람이 많이 부니 밖에 나가지 마시고 방에 계시라고 말씀드리고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와 다시 저녁 장사를 끝내고 우리 가족도 저녁을 먹고 나니 벌써 깜깜하다.

그런데 마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갈 때도 안 보이던 비닐을 쓰고 있는 배추가 보인다. 이제 소금 뿌려서 언제 김치가 되나 생각하니 눈앞이 밤보다 더 캄캄하다. 결국 김치는 지금 서두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피곤하기도 해서 소금 슬쩍 뿌려 내일 아침 일찍 하는 것으로 했다.

하루 종일 동동거려도 정작 중요한 일은 빼먹고 내일로 미루게 되어 내일 아침도 허둥거리게 생겼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니 이제부터 시간대 별로 해야 할 일을 적어 어디 벽이나 냉장고에 붙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기억은 점점 가물거리고 몸은 둔해지고 계절은 봄인데 정신은 이미 가을 중턱으로 치닫고 있다. 몸 관리도 해야겠지만 정신이라도 다시 봄으로 가고 싶다. 여기저기 꽃소식이 들리는데 내 마음만 계절을 거꾸로 간다면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엊그제는 한 겨울에도 보기 힘든 설경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나도 계절과 나란히 봄 길을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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