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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벌레의 길

 

 

 

벌레의 길

                           /이은주

텃밭에서 키웠다는 열무잎을 다듬다가

야금야금 씹어나간 벌레길을 보았다

한 바퀴

뱅글 돌다가

삐뚤삐뚤 짚어간

온몸을 지팡이삼아 그물맥 헤집으며

골목에서 신작로로 곡예하듯 오르내린

여름 끝,

생의 이력을

한 줄로 요약했다

매순간이 첫 술이고 출발의 연속이니

먹어야 길이 되는 후진 없는 하얀 외길,

그 무슨

‘무공해’ 사인처럼

필기체로 환하다

- 이은주 시집 ‘섭섭한 오후’

 

 

무농약 야채 재배가 쉽지 않다. 벌레들의 공격에 단박에 쑥대밭이 되는 걸 여러 번 경험했다. 텃밭에서 조금씩 키우는 정도라야 그나마 먹을거리로 수확이 가능하다. 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찬란하고 풍성한 식탁일까. 시인은 열무잎을 삶의 터전 삼아 열심히 헤쳐간 벌레의 길에 주목한다. 우리의 눈으로는 벌레구멍이지만 벌레에겐 치열한 생의 몸부림의 궤적인 것이다. 요약된 생의 이력인 것이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는 인간들이 밥벌이를 위해 묵묵히 일터를 오가듯 벌레들은 그저 부지런히 주어진 생을 살아간 것 뿐이다. 이렇듯 관점의 이동이 화자의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되어 시적 완성도를 가져 온다. 그것이 한편으로는 ‘무공해’ 사인이니, 그 필기체의 신호가 우리에게도 안전한 먹거리의 증표가 되므로 공생의 마음자세 및 생명공동체적 정신을 일깨우는 것이다. 앞으로는 벌레구멍을 찾으려 야챗단을 열심히 뒤적여야 할까 보다./이정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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