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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松시선]120년 전, 토론문화를 꽃 피우다

 

 

 

1895년 12월, 고종이 서재필을 만났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미국에 망명했던 역적 서재필을 정부의 고문관 자격으로 초청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의 토론문화에서 빠트릴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서재필은 1896년 4월에 창간한 ‘독립신문’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무슨 일이든지 공사간에 문을 열어놓고 서로 의논하여 만사를 작정하고 실상과 이치와 도리를 가지고 햇빛 있는 데서 말도 하고 일도 하는 것이 나라가 중흥하는 근본이다”

9월에 고종이 칙령 제1호로 반포한 의정부 관제에 회의라는 항목과 회의운영에 관한 세부 규정이 실려 있다. 서재필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통해 토론회를 보급할 무렵에 정부에서도 근대적 회의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같은 시기, 서재필이 배재학당에서 미국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토론의 필요성을 강조했을 때 깊이 공감한 학생들이 ‘협성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협성회 학생들이 논의를 통해 만든 토론회의 세부 규칙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공평한 발언시간을 가져야 하고, 정해진 방식에 따라 말해야 한다.

-토론은 찬성과 반대의 양편으로 나뉘어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상대방 주장을 반박해 가는 것이다.

-양측은 토론할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명확하게 찬성과 반대로 나뉠 수 있는 주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토론의 주제가 정해지면, 주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되 반드시 현 상황을 개선하거나 현재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설정해서 만들어야 한다.

협성회의 첫 토론 주제는 ‘국문과 한문을 섞어 씀이 가(可)함’으로 당시 쟁점이 되었던 문제를 다루었다. 1897년 7월, 협성회의 공개토론 시범을 보기 위해 학부대신 민종묵을 비롯한 600여 명의 청중이 몰려들었다. ‘동양의 여러 국가는 서구의 방식을 빌려 개화해야 한다’는 논제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 큰 자극을 받은 독립협회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토론회 도입을 의결했다.

한 달이 지난 8월, ‘조선의 급선무는 교육이다’라는 논제를 시작으로 독립협회는 일요일마다 토론회를 열어 시민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토론회의 절정은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열린 관민공동회였다. 의정부 대신 박정양을 비롯한 대신과 고관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와 시민·학생 1만여 명이 참석했다.

훗날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 한국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려고 서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겼지만, 어느 정도 지도도 받고 또 격려도 받은 다음엔 수백 명 회원이 아주 효과적인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 연설엔 선천적인 재능이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밖에 평등한 입장에서 갖가지 논제를 토의한 그 조용하고도 질서정연한 의사 진행 방법은 한국 청년층과 그리고 토론회에 참여했던 회원들에게 굉장한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 토론문화는 서구로부터 이식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1893년 봄에 열린 보은집회는 한국의 토론문화가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종의 명을 받아 동학농민들의 보은집회 현장을 방문했던 어윤중은 고종에게 “동학은 비도(匪徒)가 아니고, 민당(民黨)으로서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민권주의자에 가깝다”고 보고했다. 토론회 혹은 집단회의를 통해 전체의 의사를 결정하는 전통을 바탕으로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을 맺은 후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통해 폐정 개혁안을 실시했다. 19세기 말 들불처럼 번져간 토론문화의 확산과 1919년의 만세운동은 이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꽃피운 것이다.

요즘 TV토론회를 시청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토론의 기본도 모르는 교수와 변호사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120년 전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밤샘토론을 벌였던 동학농민이나 만민공동회에 모였던 시민·학생들에게 토론의 자세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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