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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색채가 주는 인상을 좇아 달려갔던 청기사

 

 

 

칸딘스키는 완전한 추상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그의 작품은 무엇을 그린 것인지 대중들에게 한 번에 이해되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 무렵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저서를 출판함으로써 자신의 예술관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유려하고 풍부한 필치의 문장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성찰된 것들, 지극히 섬세하고 예민한 것들을 막힘없이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두 번째 장, ‘운동’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한다. 정신적 고양 수준을 나타내고 있는 삼각형에 관한 이야기로서, 칸딘스키가 고안해낸 것이다. 이 삼각형은 밑변을 바닥에 두고 있으며 가장 좁은 각은 꼭짓점에 위치하고 있다. 삼각형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서서히 상승하면서 움직인다. 그러면서 ‘오늘’의 정점이었던 부분이 ‘내일’에는 변이 된다. 그는 정점 자리에 외롭게 서 있는 한 사람이 바로 위대한 예술가라며, 예전에 베토벤도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라고 말한다.

밑변에는 정신적 만족에 굶주린 대중들이 예술가를 향해 열렬한 손길을 뻗고 있다. 그 사이 삼각형의 변에는 많은 예술가가 존재한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예술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예언자의 역할을 하며 무거운 수레를 끌고 위를 향해 전진해나간다. 그러나 통속적인 목적이나 동기를 지닌 예술가들은 현재의 작업으로도 충분히 이해되고 갈채 받는다.’ 베토벤이 교향곡 7번을 완성하면서 꼭짓점에 도달했을 때 대중들과 지인은 그의 예술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반론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혹자는 ‘예술가라는 존재가 뭐 그리 대단하기에 저 높은 꼭짓점에 홀로 서 있거나, 꼭짓점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딛는 존재로 묘사를 하고 있을까’하고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 칸딘스키가 치렀던 모욕과 수치를 되새겨보면, 대중들의 반응을 극복하며 앞으로 나가야 하는 예술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속해있었던 모임 ‘청기사’의 전시회에서는 매일 저녁 갤러리 주인이 작품에 사람들이 뱉고 간 침을 닦느라 정신이 없다며 불평을 할 정도로, 그는 당시에 미움 받는 예술가였다. 작품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던 대중들의 분노는 그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책에는 색채에 관한 재미있는 표현도 등장한다. 푸른색은 전형적인 하늘색이라는 것이다. ‘푸른색이 검은색으로 침잠하게 되면 엄숙하고 고독한 슬픔의 음향을 얻게 된다. 반면 푸른색이 밝은색으로 넘어가면 무관심한 성격을 나타내고, 냉담해지면서, 음향을 상실하게 된다.’ 그가 동료들과 함께한 모임의 이름을 ‘청기사’라고 지었던 것도 푸른색이 지닌 이 인상 때문이었다. ‘청기사’는 1903년 칸딘스키가 완성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는 푸른 망토를 두른 기사가 백마를 타고 초원을 달리고 있다.

푸른색이 그러한 인상을 지녔다는 주장도 작가의 매우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도 있다. 푸른색을 느끼는 방식은 개인마다 충분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자기만의 색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기까지 그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는 한때 클로드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색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다. 그런데 다음날 같은 작품을 봤을 때 그 인상을 찾지 못해 한동안 그 인상을 되새기느라 많은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는 습작을 통해 점차 대상의 형태를 포기하고 좀 더 색채를 강조해갔다. 그와 같은 과정을 수없이 난 뒤에서야 대상의 형태를 그리는 일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색채가 주는 강렬한 인상은 그의 인생을 통째로 사로잡아버려서, 안정적인 직업을 내려놓고 먼 타지로 떠나도록 그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기도 했다.

1924년 작 ‘노란 점’이라는 작품에서 노란색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화면의 중앙에는 큰 삼각형이 위치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도형들이 부유하고 있다. 이 삼각형 역시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중일까.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형들도 각각의 독특한 인상을 풍기며 작가의 내면에서 떠다니고 있던 것일까. 그 인상이 어떠했길래 이 작품의 제목은 ‘노란 점’으로 지어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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