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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 벚꽃 연서(戀書)

 

 

 

어쩔까. 낭창거리는 저 봄의 허리. 매화 향이 지자 목련이 북으로 고개를 돌려 한 장 한 장 꽃잎을 열어젖힌다. 봄을 앓는 벚나무, 몸이 달아 화르르 열꽃을 피운다. 솜을 얹은 듯 촘촘히 매달린 꽃무리. 하늘거리는 연분홍. 그 몽환적인 가지라니.

한 번에 피고 한 번에 지는 벚꽃. 모든 송이가 하나의 운명 공동체다. 사는 것도 같이, 죽는 것도 같이 하자고 약속을 한 것 같다. ‘피어라’ 혹은 ‘떨어져라’ 하고 누군가 명령을 한 것도 같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미련 없이 잎자루를 놓는 것을 보면.

꽃잎을 여는 것은 힘들어도 지는 것은 잠깐이다. 마음을 열기는 어려워도 돌아서는 것은 순간인 것처럼.

꽃이 진다는 것은 세상이 흔들리는 일이다. 동백의 낙화가 가슴을 무참하게 만드는 것은 피보다 붉은 꽃잎이 시들지도 않은 채 떨어진다는 데 있다. 상대는 이미 변심했는데 동백의 사랑은 여전히 붉다. 생으로 목을 꺾은 절개가 땅으로 떨어진다. 아리다.

목련의 낙화는 처참하다. 하나둘 천천히 피었다가 먼저 핀 차례로 꽃잎을 떨어뜨린다. 화려할수록 생은 짧아서 요절한 미인처럼 애달프다. 땅에 떨어진 꽃잎이 갈색으로, 검은색으로 변해간다. 사랑의 끝이 좋지 못하다. 흠모하던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것처럼 쓰라리다. 나무에 피는 연(蓮). 그윽한 향과 고결한 꽃잎을 사랑한 대가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 꽃이다.

앵두꽃은 짧다. 당차게 초리까지 피워 올린 꽃이 잠깐 사이에 호르륵 떨어진다. 벚꽃에 한눈을 팔다 보면 이미 꽃이 진 뒤다. 보아주지 않으면 미련 없이 꽃잎을 떨어뜨린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끝내고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 애인처럼 매몰차다. 바닥에 소복이 쌓인 앵두꽃잎을 들여다보며 빨간 열매가 매달리기를 기다릴 뿐이다.

낙화가 아련한 것 중의 하나가 벚나무다. 이별을 한다면 이처럼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꽃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아기 손톱만한 꽃잎 다섯 장이 잎자루에 간신히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벚꽃의 낙화가 아름다운 것은 연한 꽃잎이 흩날리기 때문이다. 시들기도 전에 숨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건강한 여인보다 가녀린 여인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것처럼 크고 화려한 꽃보다 여리고 작은 꽃이 지는 것은 더 애처롭다.

벚꽃 같은 사랑을 했지만 어쩔 수 없다면 기꺼이 보내겠다는 마음이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다고, 시들지 않는 마음을 흩날린다. 마지막까지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고 싶다고. 그래서 낱장으로 흩날리는 꽃잎 하나하나가 가슴에 점을 찍는다.

연남동 골목은 벚꽃이 지고 있다. 어디선가 ‘만세’하는 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니 트레이닝 차림의 청년이 두 팔을 들어 올리고 리듬을 타듯 자전거 폐달을 밟는다. 바람을 가르기나 할 듯이. 벚나무가 늘어선 길에 꽃잎이 날린다. 청년의 머리에, 어깨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꽃잎, 꽃잎들. 청년은 봄이 묻은 음성을 어딘가로 전송 하고 있다.

“와우. 눈 내리는 것 같아. 꽃잎이 날려”

달뜬 목소리가 꽃비 날리는 골목에 울린다. 그리고 잠깐 뜸을 들이다 내뱉는 한마디.

“네가 보고 싶어”

자전거 바퀴가 연분홍 회오리를 일으킨다. 그러다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고 꽃잎이 흩어진 길을 반으로 가르며 자전거는 시야에서 멀어진다. 간절한 목소리도 골목 끝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청년이 떨어뜨리고 간 그리움이 골목으로 스며든다. 그 말을 엿들은 벚나무들도 일제히 팔을 흔든다. 가지를 떠난 연분홍 연서들은 바람을 타고 팔랑거린다. 여기저기로 날리고 흩어진다. 나는 벚꽃 물든 한마디를 남기고 봄날의 골목을 천천히 빠져 나온다.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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