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동남각루 下

 

 

 

수원화성 동남각루의 용마루 방향에 대해 좀 더 살펴보겠다. 이전 글에서 구조역학상 계단이 있는 후면에는 중앙기둥이 없어 용마루의 하중이 측면으로 전달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점을 피력하였다.

배치 디자인적으로 동남각루는 남성(南城)의 끝에 자리하여 남성(南城)과 축선(軸線)을 맞추고 있으므로 정면은 당연히 남향이 되는 것이며, 지붕의 방향도 남향을 정면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설명하였다.

수원화성을 자세하게 그린 건축도(建築圖)는 정조 시기의 ‘정리의궤(1797년)’와 ‘화성성역의궤(1801)’, 정조 사후에 제작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반차도(1815~1823년 제작)’가 있다. ‘정리의궤’와 ‘화성성역의궤’의 건축도에서 동남각루와 남공심돈의 용마루는 동향을 하고 있지만 ‘화성반차도’에서 동남각루와 남공심돈은 남향을 정면으로 하고 있어 서로 다르다.

‘화성반차도’의 오점으로는 동남각루의 지붕 형태를 우진각이 아닌 팔작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이런 실수는 화공의 건축적 이해 부족으로 우진각과 팔작지붕을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남공심돈의 지붕도 합각으로 잘못 표현하고 있어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세부 표현에 있어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의 배치와 좌향 등 큰 줄기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동남각루 복원설계도에서는 이를 종합하여 지붕의 정면을 70년대에 복원한 동향이 아닌 남향으로 돌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여러 이유로 현상 유지하는 방향으로 결론 짓고 말았다.

복원설계도에서 반영되지 못한 것 중 또 하나는 1층 온돌방의 위치이다. 화성성역의궤 권수(卷首)에서 ‘규모가 5량 4칸으로 높이와 너비가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 다만, 4칸 모두 마루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계단을 설치하고 서남(西南) 한 칸은 마루 밑에 온돌방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때문에 1978년 복원할 때 온돌방을 서남 칸에 설치했다.

기록에 따라 온돌방은 당연히 서남칸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를 따랐을 경우 여러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기록에는 규모와 너비 등이 모두 서북각루와 같다고 했으나 온돌이 서남칸이며 성곽 쪽으로 붙어 서로 위치가 다르게 된다. 둘째, 구조적으로 계단이 있는 후면에는 중앙기둥이 없다. 여기 서북칸에 온돌방을 설치했다면 상부 하중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서남칸에 설치함으로써 취약한 구조가 되었다.

셋째, 온돌방이 성벽 쪽에 붙게 되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동선(動線)이 멀어져 경계에 효율성이 떨어진다. 온돌방의 위치가 서남쪽이라는 의궤의 기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여러 가지 정황과 목수 김성인의 능력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온돌방의 위치는 매우 비합리적이다.

필자의 복원설계도에서 몇 가지 의견은 반영되었다. 첫째, 화성성역의궤의 권수의 ‘계단은 동쪽 처마 아래’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복원 건물의 계단 위치를 배면 중앙에서 동쪽으로 이전하였다. 또 머름은 8개가 복원 설치되어 있었는데 계단을 한쪽으로 이전시키면서 한 개가 줄어든 7개로 의궤의 내용과 일치되었다.

둘째, 후면부 벽체 재료가 흙벽으로 복원되었던 것을 판벽으로 변경하였다. 중앙에는 기둥이 없고 칸이 넓어 구조적으로 약한데 무거운 흙벽을 2층에 설치한 것은 매우 불합리한 구성이었다. 흙벽은 판벽보다 만들기 힘들 뿐만 아니라 난방을 하는 방에 사용하고 부엌이나 창고 등은 판벽으로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 선자연을 마족연으로 변경하였다. 성곽시설 중 사대문과 방화수류정 등 중요건물에만 선자연을 사용하고 나머지 건물에는 마족연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또 기록에도 선자연은 없고 56개 마족연만 나온다.

넷째, 암수막새가 건물 전체에 있었는데 추녀 부분에만 제한적으로 설치하였다. 막새는 일반 기와보다 비싸서 중요건물에는 전체적으로 시공하지만, 일반건물에는 비에 약한 추녀 부분에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화성 복원은 인적·물적 토대가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어 미숙한 부분이 있지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기초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 복원된 건물이 화성의 원형(原形)처럼 인식되고 있어 제모습을 찾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