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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칸딘스키의 추상회화와 현대음악

 

칸딘스키가 ‘즉흥 19’를 완성하였을 즈음, 그는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 당시 바그너의 오페라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미술가, 문학가에게도 매우 강렬한 인상을 선사했다.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감상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 영혼에서 갖가지 색을 보았다. 내 눈앞에 색이 있었다. 그리고 거친 선들이, 거의 미친 듯한 선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

음악을 사랑했던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통해 체험했던 그 찬란한 색채들을 과감하게 캔버스 위로 펼치기 시작한다. 음악에서 얻은 감흥을 극대화하고자 형태를 지극히 단순화시키거나 생략했다. 아직 칸딘스키가 온전한 추상화로 가기 이전이었기에 이때까지는 그가 무엇을 캔버스에 그려놓았는지 우리는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하지만 칸딘스키가 진정 그리고자 했던 것은 식별할 수 있는 나무나 산, 집과 같은 대상이 아니었다. 캔버스를 자유롭게 뛰놀고 있는 색채를 통해 내면적인 감흥, 정신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그의 진정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의 ‘즉흥 19’를 보고 있노라면 배경에서 물결치고 있는 푸른색이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의 충만하고 꽉 찬 사운드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무렵 음악이 칸딘스키에게 주었던 영향이 그만큼 크고 강렬한 것이어서, 이 시기 완성된 ‘즉흥’ 시리즈 전체를 두고 음악과 음향을 회화로 표현한 작품들이라고 언급되기도 한다.

‘콘서트’라는 부제가 달린 1911년 작 ‘인상 3’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 완성한 작품이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와 연주자, 오케스트라, 그에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이 꽤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하지만 배경을 덮고 있는 노란색이 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와 극명히 대비를 이루어, 그가 앞으로 이루어낼 추상화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음악 장르는 완연한 현대의 길로 가고 있었다. 쇤베르크는 7개의 음계와 소수의 으뜸음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의 작곡 형식을 과감히 무시하고, 반음들을 섞어 총 12음계를 구성한 다음 이를 바탕으로 작곡을 했다.

특정 으뜸음이나 주제가 딱히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음악은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존 케이지, 백남준과 같은 후배 예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쇤베르크는 음악에서 관습적인 형식을 파괴한 것처럼 회화에서도 그럴 수 있다며 칸딘스키를 응원해주었다. 수준급의 피아노와 첼로 연주 실력을 지녔던 칸딘스키는 쇤베르크의 음악을 이해했고 열렬히 지지했으며, 그의 실험을 자신의 회화에도 적용했다.

드디어 칸딘스키가 화면에서 모든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지워버리고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도형을 채워 넣기 시작했을 때, 이 실험은 마치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매우 위험한 것으로 여겨졌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작품에 분노한 관객들의 반응은 이미 지난 시간에 다뤘다.

무엇보다 왜 작가가 그러한 추상의 세계로 나가야 할 수밖에 없었는지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한 예로 같은 시기 활동했던 마티스는 회화가 완전한 추상으로 가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있었고, 죽을 때까지 경계를 결코 넘어선 적이 없었다.

칸딘스키가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점, 선, 면’ 등의 저서를 냈던 것은 그가 뛰어난 문필가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추상회화의 필연성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요구에 당면해서다.

이 책에서 칸딘스키는 자신이 추상의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내적 성숙과 여건들이 차고 넘치도록 충분한 자양분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였던 칸딘스키에게는 온갖 색채와 형태들이 그처럼 무한한 정신적인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부유하거나 진동하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캔버스에 옮겼어야만 한다.

칸딘스키의 저서에는 작가가 숙고하여 결론을 내린 각각의 도형과 색채에 대한 의미가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그의 추상회화는 작가의 뜨거운 감성과 에너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칸딘스키가 완성한 추상회화를 일컬어 ‘뜨거운 추상’이라 하는 것도 그 연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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