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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서남각루(華陽樓)

 

 

 

각루(角樓)는 보통 방형(方形)의 왕궁이나 성곽의 담장 모퉁이에 설치돼야 한다. 그런데 수원화성의 배치형태는 방형이 아닌 원형(圓形)에 가깝다. 원형 성곽에 각루를 설치하게 된 것은 수원화성의 위계를 높이기 위한 정조의 의지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각루 건립 계획은 처음에는 없었고 을묘년(1795) 행차가 끝나고 진행한 2차 공사에서 도입됐다.

서남각루는 팔달산 남쪽에 있는 용도(甬道, 성안에 무기나 양곡을 운반하며 양쪽에 담으로 쌓은 좁은 길) 끝에 있다. 서남각루를 제외한 3개 각루는 그나마 성곽 모퉁이에 있지만, 이 각루는 성곽에서 튀어나온 용도의 끝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모퉁이와의 상관관계가 없다. 만약 용도가 없었다면 남성(南城)과 서성(西城)이 만나는 현재 서남암문의 자리에 각루를 설치했을 것이다. 그렇게 설치했다면 용도로 인해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위계를 위해서 만든 각루의 의미가 퇴색됐을 것이다.

건물의 방향을 살펴보자. 서남각루의 건물 방향은 동서를 하고 있지만, 나머지 3개 각루는 남북을 정면으로 하고 있다. 수원화성 행궁은 동향을 하지만 수원화성의 주요방향은 남북방향이다. 십자각인 동북각루과 서북각루의 건물은 북향하고 동남각루는 남향을 주 방향으로 삼고 있다. 동남각루와 같은 위계를 갖는 서남각루도 남향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데 왜 동서 향을 하고 있는지 미지수이다.

활용적인 면에서 서남각루의 공간은 6칸으로 남쪽 2칸은 판벽이 설치된 마루로 돼있고 북쪽 4칸은 벽돌이 깔린 봉당(封堂, 지붕은 있으나 벽이 없는 공간)으로 돼있다. 다른 각루는 공격 시설을 겸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부분이 보이지 않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최남단의 마루 공간 벽은 당널문 칸별로 4짝(총 16개)이 달려 있으나 전안폐판(箭眼蔽板, 총안을 덮은 판)이 없다는 점이다. 전안폐판은 공격을 위한 것으로 동북각루는 72개, 서북각루는 14개, 동남각루는 6개가 설치돼있다. 여기에 전안폐판이 설치되지 않은 것은 당널문에 총안이 없다는 것으로 전투를 목적으로 한 건물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둘째, 봉당은 전투에서 필요한 부분이 아니며 눈과 비(雨) 등으로 야외활동에 제약이 있을 때 활용하기 위함이다. 수원화성에서 봉당은 서장대나 동장대에서 장군의 지휘와 사열을 위해 설치했다. 정리하면, 서남각루에서 벽돌을 깐 4칸의 봉당은 다른 각루처럼 전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장군 지휘소 역할을 했다는 근거가 된다.

아쉬운 점을 살펴보자. 각루는 정약용의 기본설계에는 없었고 축성공사 2차에서 추가되면서 그의 의도와 다르게 수원화성은 변했다. 만약 각루의 추가가 본 설계자인 정약용과 협의 하에 이루어졌다면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 성곽이 됐을 것이다. 다산이 만약 설계변경을 의뢰받았다면 서남각루는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설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하나는 위치 문제로 서남각루의 위치를 용도 끝이 아닌 현재 서남암문 자리에 설치했을 것이다. 외부에서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루는 모퉁이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용도(用度) 문제로 장대(將臺)보다는 포루(砲樓)로 사용했을 것이다.

서남각루의 위치는 팔달산 능선 남쪽 끝으로 남쪽 평야가 멀리까지 보이는 고지로 전쟁 시 성곽의 척후지(斥候地, 적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위치)로서 여기에 포(砲)를 설치한다면 높아서 먼 곳의 적을 보고 공격하기 쉽다.

또한 팔달문을 공격하는 적을 측면에서 포로 공격할 수 있어 여러모로 포대(砲臺)로 적합한 곳이다.

다산은 기본설계만 하고 이후에 진행된 설계변경이나 공사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공사를 이끌어 나가기에 그의 나이 33세로 경험이 부족하고 당시 공사(工事) 주관은 무관(武官)이 담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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