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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 얼굴 주름마저 근엄!

‘교과서 돋보기’ 테마展 기획
조선 후기 동방의 성현 추앙
주자학 신봉자·서예가로 유명
8월까지 전시실 입구서 공개

 

 

 

道박물관서 ‘송시열 초상’ 전시

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문화가 있는 날을 기념해 오는 8월 31일까지 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한 테마전을 개최해 관람객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다가간다.

이번 테마전 ‘교과서 돋보기’는 지난 2016년 1월 구석기시대 대표유물인 ‘주먹도끼’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20여 차례 교과서 속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송시열 초상’은 심의에 흑색복건을 쓴 유복본 초상으로 안면의 채색이나 표현에서 조선 후기 양식이 두루 감지되는데, 특히 의복의 표현이 필선 아래 담묵으로 입체감을 살린 것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시열은 단일 인물 초상화로는 가장 많이 남아있는데 18세기 이후 문묘(文廟)에 배향되면서 전국의 서원과 영당에 그의 초상을 모셨기 때문이다.

그는 주자(朱子) 이후 동방의 성현으로 존경을 받은 대학자였으며, 특히 정조(正祖, 재위 1776~1800)는 그를 존경해 직접 ‘송자’라 칭하며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그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송자대전’을 간행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그늘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기 시작한 조선 후기는 학문과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로 송시열(1607~1689)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며 서예가로서 한 시대를 휘어잡은 걸출한 정치가였다.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그의 아들 김집(金集, 1574~1656)에게 사사받아 뛰어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당대 제일의 학자로 성장했다.

또 그는 율곡 이이(李珥, 1537~1584)의 학풍을 계승한 기호학파로서 주자학의 신봉자이면서 주자의 가르침을 평생 따라야할 원칙으로 생각하고 실천했고, 성리학의 이상을 조선의 현실에 적용시켜 실천해 나간 사림의 지도자였다.

후학들에게는 ‘송자(宋子)’라고 극존의 존칭으로 불릴 만큼 사림들의 존경을 받은 대학자였다.

인조반정 이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될 때 최명길의 추천으로 그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으로 임명됐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면서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정계에 등장해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철학을 관철시켰다.

특히 1차 예송에서 기년설을 관철시키면서 서인의 지도자이자 정신적인 지주로 우뚝 섰고, 그 후 좌참찬, 우의정, 좌의정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사촌사이였던 송준길(宋浚吉, 1606~1672)과 함께 ‘양송(兩宋)’으로 불리며 학문적·정치적 동지로 평생을 함께 했던 송시열은 조선 후기 명필로서 석봉체(石峯體)를 토대로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녹여내 웅건하면서도 장중한 무게와 기품을 더한 ‘양송체(兩宋體)’를 창안했다.

이에 그들을 추종하는 서인세력뿐만 아니라 많은 유림들이 양송체를 사용했으며, 이후 후학들에게 서법(書法)의 교과서로 추앙받으며 널리 사용됐다.

한편 송시열 초상은 오는 8월 31일까지 경기도박물관 상설전시실 입구에 전시될 예정이다.

/최인규기자 choiink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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