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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구스타프 클림트가 이룬 두 번의 성공

 

구스타프 클림트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가의 부름과 두둑한 사례를 받으며 승승장구 하던 시절,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너무 이른 시기에 찾아온 성공 덕분이었는지, 혈기 왕성한 젊은 화가의 용맹함 덕분이었는지, 그는 곧 스스로 자신의 성공을 발로 걷어 차 버린다. 황가의 압도적인 지배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던, 보수적인 정치와 문화의 온상이었던 빈에서 지배층으로부터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파격적인 그림을 그림으로써 도시 전체를 시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존의 사회적 가치관을 흔들어 버리는 현대적인 주제, 너무나 에로틱해서 파격적이기까지 했던 여성의 나체, 은밀한 사생활로서나 만끽할 수 있을법한 성적인 환상이 캔버스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보수적인 지식인과 비평가들은 그가 난잡하고 추한 것을 그리는 작가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오스트리아가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역시 미술사에서 한동안 잊혀졌다. 그가 황가의 주문을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시절에 완성했던 초기의 작품들과 함께, 도시 전체를 혼란으로 빠뜨렸던 관능적인 작품들 역시 대중들의 뇌리에서 거의 잊혀질 뻔했다. 그러다가 그의 작품이 다시금 어마어마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0년 후반의 일로, 클림트의 사후 70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대중매체가 일상적으로 성을 상품화하는 세상 속에서 클림트가 그린 여성들은 더 이상 파격적이지도 유별나지도 않았지만, 그 대신 고풍스러우면서도 지적인 매력을 발산하게 됐으며, 여인들을 장식하고 있는 금박들은 그러한 매력을 극대화 시켜주고 있었다. 현대인에 의해 새롭게 포착된 클림트의 작품들은 각종 상품의 광고 이미지와 결합하며 점점 더 유명해져갔으며, 어느 세계적인 유명 화장품 회사의 대표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을 천문학적인 가격에 구입했다는 뉴스는 클림트를 향한 세간의 관심을 더욱 뜨겁게 불을 지폈었다.

대가의 반열에 우뚝 선 이래, 기라성과 같은 명성을 한 번도 실추해본 적이 없었던 위대한 화가들과 굳이 비교해보자면, 클림트의 명성에는 일종의 굴곡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지점이야 말로 클림트라는 예술가가 지닌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사후 한 세기가 지나 전혀 다른 매력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다시 받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클림트는 두 개의 세기에 걸쳐 예술적 성공을 거둔 셈이다.

클림트가 생존할 당시 이룩했던 첫 번째 성공은 비단 오스트리아를 깜짝 놀라게 했을 뿐만이 아니라, 기성 화단에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던 신진 화가들에게 돌파구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찾아온 두 번째 성공은 그가 이룩한 장식적이고 세련된 회화의 양식이 영원불멸의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반증했다. 보수적인 정치와 문화의 도시 빈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빈 사람이었던 그가 두 번의 시대의 파도를 타고도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성공적인 예술적 성과를 이루었던 사실 또한 매우 흥미롭다.

화가 클림트가 이룬 두 번의 성공에 대하여 언급한 김에, 그가 생존에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혁신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화가로서의 보장된 성공을 저버리고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작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젊은 화가의 여유로운 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 서른에 성공을 이루었다 해도, 십대 때부터 황가를 위해 그림을 그려온 그였으니 예술가에게 가하는 황가의 각종 간섭에 진력이 날대로 난 그였다.

주변국에서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화가들이 완성한 새로운 양식이 연일 새롭게 소개되고 있었는데, 보수적인 화풍을 고수하는 오스트리아의 화단에서는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진부한 역사적 주제만을 반복해 그리고 있었다. 클림트는 그 무렵 기로에 놓인 기분이었을 것이다. 성공한 화가로서의 삶에 안주할 것인지, 역사에 남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아방가르드의 물결에 몸을 맡길 것인지 말이다. 클림트는 그에 대해 그다지 깊이 고뇌하지 않았던 듯하다. 장군과 같은 기세로 용맹하게 실험에 뛰어들었다. 게다가 그 무렵 발표됐던 프로이트의 연구 논문은 화가 클림트를 강렬하면서도 에로틱한 세계로 강력하게 빨아들이고 있었으니, 내심 신이 났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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