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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 수원화성의 정문(正門)

 

 

 

수원화성의 둘레는 5.7㎞(4천600보)로 한양도성의 약 1/3, 면적은 약 1/10이 된다. 수원화성은 한양도성보다 규모는 작지만, 지방 읍성과 비교하면 큰 편에 속한다. 보통 읍성의 경우 둘레는 1㎞ 내외로 지금도 잘 남아있는 낙안읍성은 1.4㎞, 해미읍성은 1.8㎞이니 수원화성이 얼마나 큰 읍성인지 알 수 있다.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처음 계획할 때는 3천600보(4.3㎞)였으나 공사 도중 정조에 의해 1천보가 늘면서 거대 읍성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성문(城門)의 개수는 성곽의 크기와 관계있다. 수원화성은 규모가 커서 성문이 많이 필요하지만, 지형적으로 보면 남북은 평지로 트여 있고 동서는 산으로 막혀 있는 평산성(平山城) 형태이다. 그러므로 대문은 남·북성에만 설치하고 동·서성에는 비상시에 사용하는 암문(暗門)만 있어도 충분했다. 그러나 수원화성의 격을 도성과 맞게 하려고 사대문을 만들고 여기에 암문 5개를 설치한다. 대문은 성곽의 위계를 표현하기 위해 높은 육축과 누각을 세우고 암문에는 보통 적군의 눈에 띄지 않게 이런 시설을 만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수원은 하천이 도시를 관통하므로 물이 들어오는 곳과 나가는 곳에 각각 수문(水門)을 만들어 문은 총 11개가 된다.

사대문의 이름은 북문 장안문(長安門), 남문 팔달문(八達門), 동문 창룡문(蒼龍門), 서문 화서문(華西門)이다. 수문은 성곽을 관통하는 수원천(柳川)의 상류에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과 하류의 남수문이 있다. 암문은 위치별로 남암문, 동암문, 북암문, 서암문, 서남암문이 있다. 사대문 중 위계는 남·북문이 같고 동·서문이 같다. 위계가 높은 남·북문은 동·서문에 비해 육축(陸築, 성문을 만들기 위해 성곽을 두껍게 쌓은 부분)과 누각(樓閣)이 크다. 누각을 보면 동·서문은 정면 3칸으로 단층이지만, 남·북문은 정면 5칸에 2층으로 되어 있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남·북문과 동·서문의 크기를 엄밀히 따지면 북문이 남문에 비해 크고 동문은 서문보다 조금 크지만, 이 정도 차이는 당시 기술로 볼 때 오차의 범위라고 본다.

수원화성의 정문을 두고 남문이라는 주장과 북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보통 성곽에서 정문은 하나인데 여기서는 남·북문이 같은 크기를 가지고 있어 그 우열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은 경복궁이 남향해 남쪽 숭례문이 정문이 되며, 남한산성은 행궁이 동향해 동문(東門)이 정문이 된다. 그러나 수원화성은 행궁이 동향하는데 동문은 산에 있어 처음부터 정문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남·북문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됐다.

남문을 정문이라고 하는 주장은 1793년 2월 28일 성문터를 닦는 고유제를 지낼 때 남문에는 수원 유수 조심태를 보내고 북문은 도청 이유경을 보낸 사실과 공사 도중 각종 기록에는 남문, 북문으로 순으로 기록하고 있어 남문의 위계가 앞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북문을 정문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한양이 북쪽에 있어 왕이 오면 처음 대면하는 문이 북문이고 화성성역의궤에서 팔달문보다 항상 장안문이 앞서 기록돼 있음을 근거로 든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수원을 일반 도시가 아닌 왕의 고향이 되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 한(漢)나라 제실(帝室)이 풍패에서 일어났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한다. 을묘년(1795) 행차를 보름여 앞둔 2월 22일 행궁 정문인 진남루(鎭南樓)를 신풍루로 바꾸고 북문을 장안문으로 이름 짓고 호조 참판 조윤형에게 편액의 글을 쓰게 한다. 정조는 수원이 새로운 왕의 도시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행궁과 화성의 정문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장안문이나 신풍루 이외 다른 시설에는 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대문에 이름이 부여되기 전 공사 현장에서는 남문에 우위를 두었으나 을묘년 행차 때 장안문에 편액을 내려주면서 수원화성의 정문이 북문으로 정해지고 이를 기점으로 두 대문의 위계가 뒤바뀌게 된다. 다음 편부터 사대문을 살피고자 하는데 위에서 논증한 바대로 정문인 장안문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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