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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이야기]나만의 소확행

 

 

 

행복은 인생을 살면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엄청난 행운의 거대한 조각이 아니라 매일 느끼는 기쁨의 작은 조각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벤자민 프랭클린)

타닥타닥 비가 창문을 노크한다. 오늘은 강의가 없는 날. 딸아이를 등교시킨 뒤 평소 좋아하는 TV도 끄고, 블랙커피 한 잔을 손에 든 채 한참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회색빛 하늘에 사선으로 그어지는 빗줄기. 오랜만에 갖는 여유로운 날이다. 하늘이 매일매일 애쓰며 살아가는 나에게 ‘비 오는 날’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오늘은 어떤 약속도, 계획도 세우지 않으리라.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편하게 나를 방치하리라.

그런데 문득 ‘부침개!’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비오는 날은 부침개’라는 공식이 있다. 얼른 냉장고 문을 열었다. 둥그런 양푼이에 밀가루와 튀김가루를 섞은 후 물을 부어가며 살살살 풀었다. 여기에 부추, 오징어, 양파, 고추를 길쭉하게 썰어 넣고 약간의 소금 간을 한 후 프라이팬에 고소한 들기름을 두르고 둥그렇게 부쳤다. 지인에게 선물 받은 황토색에 빗살무늬가 들어간 토기접시를 꺼내어 부침개를 담았다. 고급요리 부럽지 않은 비주얼이 내 앞에 펼쳐졌다. 마치 호수에 달을 띄우는 것 같았다. 고소한 깨를 듬뿍 넣은 간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먹으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푸릇푸릇 신선한 봄이 내 몸으로 오롯이 들어왔다. 내 몸이 상큼하고 건강하게 바뀌는 순간이다. 며칠 동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처럼 날아 다녔던 나에게 스스로 따뜻한 위로를 건네 듯…

역시 먹는 즐거움은 빼 놓을 수 없는 행복한 감정이다. 꼭 거창한 것을 먹지 않아도 이렇게 기분이 좋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한 거실에서 비 오는 날에는 왜 부침개를 찾게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이런 날 부침개를 파는 식당이나 주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유는 뭘까? ‘비 오는 날엔 역시 파전에 막걸리!’라는 말이 왜 설득력이 있을까? 실제로도 대형마트 매출 통계에 의하면 비오는 날에는 부침가루와 막걸리 매출이 배나 오른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농경사회는 산이나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거나 수렵 활동을 하는데 종일 비가 오면 일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음식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비가 오면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술을 마셨고 자연스럽게 부침개를 만들어 먹다보니 비 오는 날 대표 음식이 된 것 같다’고 방송에서 설명했다.

그리고 빗소리가 부침개 부칠 때는 나는 소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부침개를 떠올리게 된다는 설도 있다. 또한 비오는 날에는 높은 습도와 저기압으로 인해 혈당이 떨어지는데 파나 부추가 혈액순환을 돕고, 탄수화물이 풍부한 밀가루가 혈당치를 높여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 오는 날에 공연히 우울한 기분이 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으로도 일조량이 감소하면 우리 몸에서 평소보다 세로토닌 분비가 줄어들며 이를 회복하려는 인체 기제가 밀가루 음식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밀가루에는 행복 호르몬 ’세르토닌’을 구성하는 주성분 단백질과 비타민B가 풍부하다고 한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이 말을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실현 가능한 행복’을 의미한다. ‘소확행’은 어찌 보면 힘든 현실 속에서 찾는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일 수도 있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보잘 것 없는 소소함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엄청난 행운의 폭포수가 갑자기 쏟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늘지만 꾸준한 빗줄기에 기쁨을 이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것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여유일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 천둥번개가 치고 광풍이 분다. 진정 우리 같은 소시민의 행복을 위해 저토록 치열하게 싸우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국회의원들도 비오는 날에는 서로 둘러 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들며 스스로 ‘소확행’을 느껴보면 어떨까? 빗소리 같은 여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오늘도 행복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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