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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松시선]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의 한 부분이다. 이 시를 지은 함석헌은 1970년부터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1980년, 신군부가 이 잡지를 폐간할 때까지 민주와 평화와 희망을 노래한 사상가이다.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다는 혐의로 1942년에 폐간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가 있다. 이 잡지는 함석헌을 비롯한 일곱 동지들이 1927년에 창간한 것으로 1930년부터는 김교신이 발행과 편집을 맡았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의 고정 필자였다. 함석헌과 김교신, 두 사람은 형제요 동지였다. 함석헌이 시에서 말한 “그 사람”은 김교신이다.

함석헌은 평안도 오산고보의 역사교사, 김교신은 서울 양정고보의 지리교사였다.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살았으나 사흘이 멀다 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함석헌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갇혀있을 때 함석헌의 부친이 별세하자 김교신은 휴가를 내고 평안북도 용천으로 달려가 상주로 장례를 주관했다. 김교신의 맏딸이 결혼할 때는 함석헌이 주례를 섰다.

함석헌과 김교신은 1901년생으로 동갑이다. 두 사람은 친밀했으나 성격은 너무나 달랐다. 함석헌은 “글쎄”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반면 김교신은 오호가 분명해 별명이 “양칼”이었다. 1934년 봄, 김교신이 펴내던 ‘성서조선’에 두 편의 글이 실렸다. 하나는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이라는 글이며, 다른 하나는 김교신의 ‘조선지리 소고’라는 논문이다. 해방 후 함석헌은 이 연재물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하느님은 과연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사명을 주시려고 이처럼 거듭 고난을 주는가라는 고통스런 물음을 던졌다. 반면 김교신은 ‘조선지리 소고’에서 이렇게 전망했다.

“조선의 역사에 편안한 날이 없었다함은 무엇보다도 이 반도가 동양 정국의 중심인 것을 여실히 증거 하는 것이다. 물러나 은둔하기에는 불안한 곳이나 나아가 활약하기에는 이만한 데가 없다. …동양의 온갖 고난도 이 땅에 집중되었거니와 동양에서 산출하여야 할 바 모든 고귀한 사상, 동반구의 반만년의 총량을 큰 용광로에 달여 낸 엑기스는 필연코 이 반도에서 찾아보리라”

1942년 3월호 ‘성서조선’에 김교신이 ‘조와(早蛙)’라는 권두언을 실었다.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이 글에서 김교신은 혹한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개구리를 빗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했다. 일제는 ‘성서조선’을 폐간하고 책을 압수했으며, 독자 200여 명을 체포했다가 김교신과 함석헌을 비롯한 핵심 13명을 구속했다. 1년 동안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김교신은 공장에 취업해 노무자의 복지를 위해 일했고, 함석헌은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1945년 4월, 노무자를 돌보던 김교신이 전염병에 걸려 운명하고 말았다. 함석헌은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 김교신을 그리워하면서 늘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오랜만에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읽으며 두 사람의 우정을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 곁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그런 사람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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