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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룡문]서원(書院)의 명암(明暗)

과거 우리의 선비들은 서원에 모여 학문을 갈고 닦았다. 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도 겸했다. 이것을 ‘존현양사(尊賢養士)’라 한다. 학업과 과거 합격이 주목적이었던 성균관이나 학당, 향교와 달리 서원은 그곳에 배향된 선현의 정신과 뜻을 되새겨 학문을 닦고, 자신의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다.

한국의 서원은 1543년 세운 백운동서원이 효시다. 설립자는 풍기군수 주세붕이지만 서원을 세상에 알린 이는 퇴계 이황이다. 그의 건의로 백운동서원은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최초로 정부 공인을 받아서다. 소수서원처럼 ‘국가의 공인’을 받은 서원을, 임금이 액자(額)를 내린(賜) 서원이라 해서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한다.

이후 우리나라 곳곳에는 수많은 서원이 생겼다. 명종때(1545~1567)만 17~18곳의 서원이 등장했다. 선조 땐 60곳 이상이 생겼고, 그러면서 서서히 당파를 형성하는 학연의 산실로 변질되기 시작 했다 또 향촌사림들은 서원을 통해 중앙관료와 연결을 맺어 입신출세를 도모하기도 했다. 그러자 서원설립은 더욱 늘었다. 현종(1659~1674) 때까지 106년간 193곳이 생기는등 서원 철폐론이 등장한 1741년(영조 17년)에는 909곳까지 늘었다.

그러다보니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선현을 존숭하는 제사보다 배향된 인물을 위헤 제사 지내는 사우(사당)의 기능이 주로 강조됐다. 또 민폐의 본산이 되면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았다. 급기야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은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는 서원 철폐령을 내린다.

이처럼 우여곡절을 겪은 서원이지만 한국의 서원은 누가 뭐래도 조선을 지탱해온 성리학 교육기관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유무형적가치 매우 큰 문화유산임이 틀림없다. 유네스코가 지난6일 16세기 중반~17세기까지 설립된 9개 서원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거기엔 지금까지 서원 원형을 거의 훼손하지 않고 보존·계승된 사실도 포함됐다고 하니 명암(明暗)이 없지 않지만 자랑스럽다. /정준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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