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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 풍경 위에 새겨진 사물들, 호안 미로의 ‘농장’

 

 

 

코발트블루 빛의 묵직한 하늘은 분명 이 대지 위에 무한한 에너지를 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화면 중심에서부터 하늘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크게 뻗고 있는 나무는 샛노란 햇빛을 받고 있고, 그 끝에 달린 자잘한 나뭇잎들은 곧 새가 되어 하늘로 날아갈 듯하다.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대지는 한껏 열기를 머금은 듯 붉고 단단해 보인다. 호안 미로가 1921년에 완성한 ‘농장’은 그가 사랑했던 고향 스페인 몬트로이그의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지만, 그곳의 정취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곳의 경치는 마냥 신비로운 꿈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그림을 보는 누구나가 화면 우측 하단에 등장하는 빨간 사각형의 정체를 궁금해할 것이다. 마치 백과사전에서 종종 등장하곤 하는, 도판의 일부분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덧씌워놓은 확대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이 도형은 시골집 앞마당에 설치된 커다란 우리의 틀일 뿐이다. 느닷없이 등장하는 이 빨간 사각형은 고향의 정취를 담고 있는 이 풍경화에서 매우 이질적인 부분으로 느껴진다.

이 사각형은 일종의 기호이다. 그것은 마치 매우 중요하면서도 숨겨진 무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마치 인체의 내부를 보여주기 위해 인체의 표면 일부를 크게 도려내 버린 형태로 그려진 그림처럼, 혹은 건물의 내부를 드러내기 위해 건물의 표면을 뜯어낸 듯 보이게 그려진 그림처럼, 불가사의한 공간의 내부를 드러내기 위해 외벽을 확 뜯어낸 것만 같다. 물론 이 빨간 사각형은 동물 우리의 뼈대일 뿐이고 헐거운 그물이 듬성듬성 쳐져 있는 이 우리는 본디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열린 구조이다. 하지만 유난히 도드라진 빨간 사각형으로 말미암아 그 내부는 마치 감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 훤히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우리 안에는 뭔가 신비로운 세계가 들어있을 법한데, 자세히 보면 말 그대로 우리일 뿐이다. 토끼, 수탉, 염소 새가 놓여있을 뿐이고, 우리의 바깥 세계와 같이 잡다한 사물들이 놓여있을 뿐이다. 하지만 주변의 붉은 대지와는 확연히 다른 금모래 빛 바닥이 이 우리를 무척 신비롭게 보이게 한다.

그림은 기호의 세계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열려 있다. 당시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활동하고 있던 호안 미로는 꿈과 무의식의 세계를 화폭에 담곤 했다. 그림 속 사물들은 인간의 인지 능력의 허점을 타고 금방이라도 기호로 치환될 듯 꿈틀거리고 있다.

파리에서의 고독하고 가난한 생활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장작 6개월간 이 그림에 매달렸다. 그는 번뜩이는 영감과 휘날리는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다.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작업에 임하는 화가였고, 1밀리미터의 오차만 발견되어도 그림을 새로 그릴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그리하여 화폭에 펼쳐진 대지도,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하얀 건물도, 심지어 하늘까지도 매우 탄탄하게 채색이 되어 있는 것이다.

대지 위에 놓인 온갖 잡다한 사물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꼼꼼하게 그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나무 조각들, 작은 나무 조각을 닮은 달팽이와 도마뱀, 도마뱀의 발자국, 조약돌과 양동이들이 모두 세밀하게 묘사가 되었고, 심지어 이들 작은 사물들이 각자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을 정도이다. 정확하게 그려진 사물들은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쓴 글씨처럼 붉은 대지 위에 정성스럽게 새겨진 기호와도 같다. 이후 호안 미로는 사물들을 알아보기 힘든 형태로, 혹은 간신히 알아볼 정도의 형태로 치환함으로써 보다 혁신적인 추상화의 세계로 나아갈 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린 시절 그에게 무한한 선물을 주었던 고향의 풍경 안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몇 달간 이 작품에 온 열정을 쏟아부었건만, 작품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이를 사겠다고 나서는 화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파리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헤밍웨이가 카페에 걸린 이 작품을 발견했고, 당시 꽤 큰 금액이었던 5천 프랑을 주고 작품을 구매했다. 이후 그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대작을 발표한 데에는 작품의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풍경 속 사물들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듯 관객들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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