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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 장안문의 용(龍)

 

 

 

 

 

장안문의 홍예 개판(蓋板, 천장)에 있는 그림은 창건 당시에는 운기(雲氣, 구름 문양)로 이는 홍예와 관련된 문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용이 수원화성의 모든 성문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용이 그 자리를 자치했는지 살펴보자.

수원화성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돼 방치되다가 1960년대 들어 관리에 들어간다. 특히 장안문은 1번 국도 위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인식되어 가장 먼저 복원의 움직임 일어난다. 장안문의 복원설계 발주는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하고 용역은 국보기술단(대표 강봉진)이 맡아 1965년에 완성했다. 복원설계는 현장 유구 실측과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해 구조는 목조로 했고 홍예 개판의 문양은 운기(雲氣, 구름)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내용은 6년이 지난 1971년 7월 ‘대한건축학회지’에 투고하는데 6년이나 지난 내용을 학회지에 굳이 발표한 것은 아마도 장안문을 콘크리트로 복원하라는 지시에 대한 강봉진(용역사 대표)이 문제 제기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장안문 복원설계는 끝났지만, 재정(財政) 문제 때문인지 진행되지 못하다가 1971년 경기도청 주관으로 추진된다. 당시 공문에는 문화재관리국 국장이 기존의 복원설계를 목조에서 콘크리트로 재설계할 것을 지시한 결재 내용이 수기로 남아있다. 그러나 재정의 어려움으로 1975년에 가서야 문루는 다른 용역사에 의해 재설계되고 복원이 시작된다. 홍예 개판은 문루 공사와 같이 진행되기 때문에 용이 그려진 시점은 장안문이 복원된 다음일 수밖에 없다.

의궤와 복원설계도의 구름 문양이 어떤 연유에서 용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추정컨대 복원 당시 한양도성의 숭례문과 흥인지문의 용 그림을 보고 따라 했을 것이다. 숭례문 개판에는 현재도 용이 그려져 있고, 1963년 숭례문 수리 공사 사진에도 용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면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나 그 이전부터 용이 그려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용(龍)이 상징하는 바를 두 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권위를 상징한다. 용은 상상의 동물로서 구름과 비를 부리는 초능력을 가져 황제에 비유됐고, 또 하나는 방위를 나타내는 사신(四神) 중 하나로 동쪽을 담당하는 신을 청룡이라 했다. 권위의 상징인 용 문양은 계급 봉건사회에서 황제를 나타내기에 사용을 제한하지만, 많은 사람이 용 문양을 좋아해 신분에 따라 발톱의 개수를 달리해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황제는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 태자나 제후국 왕은 4개 발톱인 사조룡(四爪龍), 민간에서는 삼조룡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조룡이 그려진 곤룡포(袞龍袍, 조선 왕의 예복)는 중국 황제가 내려주는 것을 예로 여겼다. 가장 오래된 궁궐 정전인 창경궁의 명정전의 보개(寶蓋, 장식 천장)에는 용이 아닌 봉황을 사용했다.

방위를 나타내는 용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듯이 고대부터 우리 문화에 자리하고 있었다. 도성의 사대문은 방위에 따른 성문으로 숭례문보다는 남대문으로 더 많이 불리었고 또 기록도 그렇게 돼있다. 고구려 평양성의 남문은 주작문이라 하고 북문은 현무문이라 하였듯이 사신(四神)의 이름을 따랐다. 경복궁의 경우 근정전 월대에 사신상 및 12지신상이 설치돼 있고 경복궁의 사대문에도 사신상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남문이라서 주작(朱雀), 북문인 신무문에는 현무(玄武) 동문 건춘문에는 청룡(靑龍) 서문인 영추문에는 백호(白虎)가 그려져 있다. 이런 개념으로 보면 도성의 사대문 개판 문양은 용이 아닌 사신이 돼야 할 것이다. 동쪽의 상징인 용이 사대문을 모두를 점령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장안문의 용은 서울 숭례문을 참고했는데 숭례문의 용 또한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1963년 숭례문이 해체 수리됐을 당시 군사정부는 강인함이 최고라 생각해서 용을 그렸다고 추정한다. 서울 도성과 수원화성에 있는 성문을 지키는 용과 전주 풍남문, 해미읍성을 지키는 봉황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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