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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 문화칼럼]영화 ‘애국혼’을 기억하며

 

 

 

‘애국혼(愛國魂)’은 1928년 상하이에서 한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다. 과연 무슨 영화였기에 한국인들이 상하이까지 가서 만들었을까? 일제의 검열을 피해 만들었던 그 영화는 바로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이다. 극영화이고 무성영화였다.

당시 일제의 영화검열이 강화되자 국내 영화인 중 일부가 상하이로 이동한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정기탁(鄭基鐸), 전창근(全昌根), 이경손(李慶孫), 정일송(鄭一松), 한창섭(韓昌燮) 등이다. 이들은 상하이에서 10년간에 걸쳐 ‘애국혼’(愛國魂), ‘양자강’(楊子江), ‘광명지로’(光明之路), ‘재회파, 상해’ 등 13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의 영화인들은 여러 제약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제의 정치적 제약은 여러 분야에서 행해졌는데 영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국에서 만들 수 없었던 영화를 타국에서라도 만들어야 했던 그들은 국내영화인에 비해 파격적인 소재를 다룰 수도 있었으며 영화를 통한 다양한 주제 전달도 가능했다.

그들이 상하이로 가서 만든 첫 영화 ‘애국혼’은 국내에서 만들지 못했던 항일영화였다. 항일영화란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이념에 항거하는 반제국주의 영화로서 당시 일제에 강점당한 한국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영화다. 그들은 일제의 검열에 의해 제재를 피해 상하이에서 우리의 염원을 영화화했다.

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중국인들에게도 영웅담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중국인들에게도 충격적이었던 안중근 스토리는 반일감정이 높아가던 당시의 중국 관객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 시대에 마땅히 만들어야 할 영화로 인류 평화의 역사를 깬 일본에 직격탄을 날린 영화 ‘애국혼’의 탄생은 그 훌륭한 명분처럼 통쾌한 작품이었다.

그들은 ‘애국혼’을 시작으로 활극영화, 애정영화, 사회고발영화 등 당시 영화 경향에 맞춰 비교적 당시 유행하던 장르의 영화들을 다루었다. 그들의 활동은 1934년 일제의 중국 침략이 확대될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문화가 다르고 제작 환경마저 다른 타국에서의 영화 제작은 값진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상하이파는 당시 해외에서 영화를 만든 유일한 한국영화인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만든 영화들이 모두 그러하지는 않지만 주된 특징은 저항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일제에 항거했던 것 외에도 사회의 부조리, 계급 타파 등의 내용과 주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은 일제의 상하이 침공으로 끝이 났지만 그들은 불멸의 흔적을 남겼다.

당시 한국에서 만들 수 없었기에 상하이에서 제작돼야 했지만 이들의 영화를 한국영화라고는 할 수는 없다. 상하이파 영화들이 갖는 영화사적 의의는 초창기 영화사의 복원이며 영화사의 공백기를 채우는 의미가 있다. 민족영화의 맥을 이으며 최초의 항일영화로 후대에 끼친 영향과 의의가 적어도 한국영화사의 큰 연결고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들에 관한 기록은 중국영화사의 기록과 국내 신문이나 잡지 기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한국영화사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상하이파 영화인의 활동은 늦게나마 이제 우리의 역사 속에 재조명되고 있다. 최초의 한류라고 할 수 있는 상하이파 영화인들의 활동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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