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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모딜리아니의 초상화

 

 

 

백색의 작렬하던 태양 빛이 한풀 수그러지고 나니 하루해가 눈에 띄게 짧아졌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땅속에서 수년을 애벌레로 살다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단 2주 동안만 살다 죽는다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세상을 진동시키고 있다.

수년 전 필자가 문화예술기관에서 교육 담당을 맡고 있었을 때, 한 남성분이 찾아와 엉뚱한 요구를 한 적이 있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너무나 감동해 미술을 배워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미술 수업에 등록한 후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모사하는 방법을 배워볼 수 없냐고 물어왔다. 이분의 요구는 당시 담당하던 프로그램의 취지에도 맞지 않았을뿐더러 수업을 이끌고 있던 선생님께도 실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그 요구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보다 꽤 어린 나이였던 필자에게는 이분의 요구가 좀 엉뚱했다는 것 말고도 께름칙했던 구석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며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남겼던 모딜리아니의 사생활에 대해 필자가 슬며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덕분에 그분이 어떠한 계기로 모딜리아니를 좋아하게 됐는지 전혀 알지도 못한 채 무조건 그분을 안 좋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분이 필자에게 딱히 나쁜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모딜리아니에 대해서 오해를 했던 건 비단 필자만은 아니었다. 1917년 그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에서도 작품이 매우 풍기 문란하다는 이유로 경찰이 출동해 전시를 중단시켜버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들 사이에서도 작품은 꽤 선풍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17년 작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누드’의 주인공은 기다랗고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운 신체를 지니고 있고,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팔과 천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으며, 두 눈은 한없이 깊고 아득하다. 고대 시대 때부터 미술가들은 꾸준히 누드를 그리거나 조각했다. 게다가 당시 파리 화가들에게 누드화 작업은 별스러운 것도 없는 매우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유독 모딜리아니의 작품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그의 누드화만이 지닌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서정적이면서도 에로틱한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는 피카소와 ‘아프리카 가면’이라는 주제를 공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은 길쭉한 형태의 얼굴에 눈이 뻥 뚫린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뿐만 아니라 나뭇결을 연상시키는 피부의 단단한 질감 역시 피카소의 입체주의 연구 시절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한때 가깝게 지내던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피카소는 그가 술과 마약에 찌든 채 주변 사람을 짜증 나게 만드는 인물이라며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다.

피카소가 수많은 경향을 탐구하는 동안 모딜리아니는 고집스럽게 초상화에 집중했다. 기다랗고 지적인 얼굴선은 그의 초상화의 트레이드마크인데, 회화 작품 외에 조각으로도 그러한 형태의 얼굴을 표현하곤 했다. 그의 조각 작품 역시 매우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가난한 화가로서는 조각의 재료를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기에, 그는 회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품은 생존에 고작 몇 프랑에 팔렸을 뿐이었고 모딜리아니는 가난하고 병든 삶을 연명하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기다란 얼굴선 말고도 그의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눈동자 없이 뻥 뚫린 눈이다. 그렇다고 마냥 허무한 눈은 아니다. 어떤 눈은 고독하고, 어떤 눈은 날카로우며, 어떤 눈은 한없이 깊다. 술과 마약으로 혼미해진 작가의 심신을 그때그때 반영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준다. 화가가 고통 속에서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몇 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지 못했고, 모딜리아니의 작품에 담긴 깊은 맛과 연민의 감정 역시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지금의 필자라면 갑자기 찾아온 그 손님이 왜 그토록 모딜리아니를 좋아하게 됐는지, 용기 내 한 번 물어봤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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