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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두의 시선]성산포 일출, 해 뜨는 집

 

 

 

여기 가을햇살이/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그때 핏덩이 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건진/수수깡 같은 노파의 잔등위로 무진장 쏟아지네/거북이 등짝 같은 눈을 가진 무리들을 바라보네/성산포 “앞바르 터진목”/바다물살 파랗게 질려/아직도 파들파들 떨고 있는데/숨비기 나무줄기 끝에/철지난 꽃잎 몇 조각/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듯 숨어드는지/섬의 우수들 뿔처럼 번지는데/성산포 4·3희생자 위령제단 위로/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제주도 강중훈 시인의 ‘섬의 우수’다.

공직에 재직하면서 보증을 서 급여압류까지 당했던 시인은 시인의 의지와 무관한 ‘해 뜨는 집’에 정착하는 계기였다. 제주도 성산읍 성산포일출봉 중심으로 우도와 옥녀봉이 있는 4·3영령들과 사는 시인은 진혹곡 같은 아픔, 분노, 증오, 미움, 저주로 4·3영혼들과 살아간다.

섬 소년으로 아픔을 안고 성장한 시인은 4·3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아버지는 이발을 하러 가신다고 외출을 한 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계신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시인은 대문을 열어두고 잠을 잔다. ‘해 뜨는 집’에는 장편소설 ‘황금물고기’저자인 노벨문학상 작가 르클레지오(Jean-Marie LeClezio)가 다녀갔고, ‘끌림’ 이병률 시인, 이지엽 시인도 다녀갔다.

제주는 아름다운 관광의 섬이지만 동네와 산 그리고 숲이 우거진 골짜기마다 학살 터는 물론이고 필자가 머물고 있는 만세로는 3·1운동의 원전지다. 죽은 자와 산자가 공존하는 4·3의 혼령들이 메아리치듯 짙게 묻어있다. 시인의 한과 정한에 맺힌 아버지의 그리움이 잠들지 못하는 아픈 기억들이 시인만의 곡진한 눈물은 아닐 것이다. 1964년 반란죄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옥살이를 했던 남아공 만델라대통령은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이 난다. 감옥 문을 나서며 증오를 털어버리지 않고서는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한들 영혼은 여전히 갇혀 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고 만델라는 말했다.

강시인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 시인이다. 굴곡의 역사성을 지닌 4·3현장을 기억하는 ‘해 뜨는 집’은 자연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문화와 휴식의 공간으로 더 진화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오늘이 고맙다고 했다. 제주의 맛 한치 물회로 오찬을 나누고 터진목을 시인과 산책했다. 강렬한 빛은 따가웠고, 성산포일출은 한산했다. 조천리 대섬 큰 동산에 위치한 까페 ‘가베또롱’ “가볍게, 부담없이”에 앉아 빙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달포가 지난 두 사람은 때마침 제주도 오승철 시조시인이 필자의 고향 해남에서 마련한 고산문학상을 수상한 탓에 다시 조우했다. 서안나, 김순이, 이승익 시인과 자축연을 가졌다. 김순이 시인의 시집 ‘제주야행’과 오승철 시집 ‘오키나와의 화살표’을 낭송하면서 밤은 깊어갔다. 돌아오는 길에 제주의 아름다운 산을 자연스럽게 보았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넘어지는 것은 저렇게 높은 산에 걸려서가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걸려서이다.

살아가는 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크고 작은 세상에 만만한 일은 없다. 고난의 언덕이 있고, 아픔들이 쌓여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사소하고 하찮은 사물도 우리들 인간처럼 영혼이 있고, 심지어 은밀하게 말을 건넨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영령들의 혼 때문인가… 잠이 오질 않았다. 연북정 해변을 걸으면서 심해선 밖으로 비치는 상현달이 아주 낮게 가까이 내려와 무언에 대화를 가졌다. 시인도 나도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사유하며 사색한다. 가족을 4.3에 의해 잃은 시인의 마음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슬픔도 시간에 닦이면 빛이 바래간다. 간절하고 뜨거운 슬픔, 순수한 슬픔으로 좀 더 친숙한 나눔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에 대하여 위로를 가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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