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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팔달문 유래 上

 

 

 

수원화성 대문의 주요 동선상에는 주 출입문인 남·북문이 있고 나머지 방향에는 동·서문이 있으며 각각 규모나 형식 및 위계는 같다. 규모를 보면 남·북문은 정면 5칸의 2층 누각이며 부출입문은 동·서문으로 정면 3칸의 1층 누각(樓閣)이다. 팔달문은 장안문과 같이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하여 장안문보다 10일 늦은 그해 9월 15일 완성된다. 크기는 팔달문이 조금 크지만, 시공 오차이며 형식과 규모 면에서 두 건물은 같다.

수원화성 공사 초기인 1794년에는 북문이 남문보다 위계가 높았는데 이는 고유제(告由祭)를 주관한 사람을 보면 알 수 있다. 1794년 1월 25일 남문 터를 닦는 일에 대한 고유제는 수원 유수 조심태가 하고 북문은 감독관 이유경이 주관하였다. 을묘년(1795) 2월 22일, 다음 달 화성을 방문할 혜경궁에게 멋진 성곽을 보여주기 위해 북문에 ‘장안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당대 명필인 조윤형(曺允亨, 1725~1799)에게 글을 주문한다. 이때부터 장안문은 정문의 지위를 갖게 되며 반대로 남문은 그 순위가 밀린다.

남문을 언제부터 팔달문이라 불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을묘년 행차에서 팔달문이란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안문이란 이름을 짓고 혜경궁이 방문하는 보름 사이에 팔달문이란 이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조윤형은 을묘년 행차 이후에 완성된 건물의 편액은 쓰지 않았다. 팔달문 편액은 조윤형이 썼기 때문에 팔달문이란 이름은 을묘년 행차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확실하다.

팔달문의 이름은 행궁의 진산(鎭山)인 팔달산에서 유래하였다. 팔달산은 광교산의 남쪽에 있으며 넓은 평야의 중심에 위치하며 남북으로 긴 산이다. 제원을 보면 높이는 해발 146m, 남북길이는 약 1.5㎞, 둘레는 약 50만㎡(15만 평)이다. 위치를 보면 팔달문은 팔달산이 아닌 평지에 있고 오히려 서문인 화서문(華西門)이 팔달산에 위치한다. 이런 문제가 있음에도 남문의 이름을 팔달문으로 명명하였는데 그 이유를 알아보자.

사도세자 묘를 1789년 구(舊) 수원읍치에 조성하면서 백성들을 이주시킬 때 시세보다 높은 가격으로 집과 땅을 매입하였다. 또 신읍치를 조성하면서 팔달산 주변의 기존 땅값도 마찬가지로 후하게 쳐주었다.

이때 팔달산의 주인은 이운행(李運行, 1736~?)이었는데 집과 선영의 묘를 옮겨야 함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그는 다음 해(1790) 수원에서 치른 별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라 이후 이조정랑과 사헌부장령까지 역임한다. 촌로(村老)의 그가 뒤늦게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특별한 배려 때문일 것이다.

정조의 의중을 추정해보자. 신읍치를 조성하는데 이운행의 협조 때문에 그를 배려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운행의 선조인 고려말 학자 이고(李皐, 1341~1420)가 이곳에 터를 잡은 입향조(入鄕祖)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이고(李皐)를 특별하게 생각했을까.

정조는 이전 1783년에 개성 성균관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웠는데, 이는 조선 초 고려학자들이 개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보낸 충심(忠心)과 절개(節槪)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고려의 충신은 조선의 역적인데 정조가 그들을 추모한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이다. 정도는 늘 아버지가 이익을 위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간악한 무리에게 희생당했다고 생각하여 충절을 가진 이를 흠모(欽慕)하였다.

그런데 이고(李皐)가 이들처럼 수원에 내려와 팔달산에 터를 잡고 충절을 지켰기 때문에 각별하게 생각하였다. 또 팔달산이라는 이름이 이고 때문에 태조 이성계가 지어준 것이라는 것을 듣고 그에 대해 특별한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정조는 팔달문의 의미를 배와 수레가 모이는 사통팔달에 있다고 했지만, 충절을 지킨 이고를 기리는 마음을 남문(南門)에 담고자 했던 속뜻이 있었다고 본다. 이고(李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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