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천고아비(天高我肥)
[생활에세이]천고아비(天高我肥)
  • 경기신문
  • 승인 2019.09.15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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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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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남시인
이상남 시인

열어놓은 창문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새어들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들려오던 지난 밤 귀뚜라미 소리만으로도 쟁쟁했던 내 여름의 열기가 꿈속인 듯 허물어지고 있다. 나에게 가을은 그렇게 특별한 예고도 없이 한 낯을 지나 서서히 스며들던 밤처럼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오곤 했다. 도로변 들판의 색깔이 변하는가 싶으면, 과일가게 가판대의 과일들이 포도-복숭아-사과-배-감으로 달라지고, 더하여 제법 길이 감 있는 머플러를 찾아 두르기 시작하면서 이미 가을은 내 안에 훅, 들어와 있곤 했다. 흔히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하는 그 가을이 말이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의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은 그 옛날 중국에서부터 유래됐다고 한다. 수시로 변경을 침략해 오던 흉노족의 말들이 중국 북쪽의 광대한 초원에서 봄부터 여름까지 풀을 배불리 먹고 하늘 높아지는 가을에는 충분히 살이 쪘다는 의미였다. 흉노족의 입장에서는 혹한기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살찐 말을 앞세우고 남쪽으로 활기차게 쳐들어갔겠지만 흉노족의 노략질에 대비해야하는 북방중국인들에게는 차라리 잔인한 계절이었을 것이다. 그 잔인한 계절 가을에 북쪽 변방으로 출정하는 친구에게 써 준 두보(杜甫)의 할아버지 두심언의 시 한 편

구름 깨끗이 개니 불길한 별이 떨어지고 / 가을하늘 높으니 요새의 말이 살찌네(秋高寒馬肥)

이 시의 추고마비(秋高馬肥)가 천고마비(天高馬肥)로 바뀌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오늘도 초를 다투며 갖가지 먹거리들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속 ‘먹방’을 보다말고 하늘 높은 이 가을이 초원도 말도 없는 나로서는 ‘천고마비’라기보다는 해마다 ‘천고아비(天高我肥)의 계절이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국경을 넘나드는 갖가지 먹거리들과 침이 고이게 하는 다채로운 요리들의 색감, 방송용으로 만발하는 연예인의 먹방 멘트까지. 달콤하게 물 오른 복숭아를 시작으로 홍시가 쏟아져 나오는 늦가을까지, 틈틈이 불어주는 가을바람에 버무려 먹은 온갖 음식들은 내 몸을 살찌우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 가을들로 찌운 살들이 서서히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득 겨울을 대비해 거추장스러운 잎들을 과감하게 떨어트릴 줄 아는 나무를 보노라면 대견할 때가 있었다. 제 몸피를 줄이고 혹한을 이겨낸 나무는 이른 봄 앙증맞은 새잎들을 내어 놓으며 활기찬 봄을 준비할 줄 안다. 그 잎들로 다시 한 번 산천을 시퍼렇게 휘젓다가도 또 다시 가을이 오면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낮출 줄 아는 그 나무의 지혜를 이즈음 배우고 싶은 것이다.

태풍 ‘링링’조차 지나간 말간 하늘을 품은 이 가을, 이미 겨울준비에 들어간 현관 앞 저 목련나무처럼 나 또한 번거로운 욕심을 훌훌 털어내고 싶다. 필요이상으로 덧대어진 내 몸의 살들은 미련없이 털어내고 겨울 곳간에 곡식 채우듯 내 마음을 차곡차곡 살찌울 줄 아는, 진정한 ‘천고아비’를 실천해보고 싶은 것이다. 마음 기둥일랑 꼿꼿하게 바로 세우고, 속내가 넉넉하여 틈틈이 나와 다른 갖가지 생각들이 가을바람처럼 들락거려도 여유가 있도록, 간혹 느닷없이 몰아치는 혹한의 통증에도 덤덤하게 버텨낼 수 있도록 마음둘레를 통통하게 살찌우고 싶은 것이다. 배 둘레가 아니라 마음둘레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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