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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빠진 농악 외길… “450년 전통 ‘광명농악’ 맥 잇는다”

소중한 유산, 무형문화재를 찾아서
2.광명농악 임웅수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 보유장인

고교 졸업 후 한국민속촌 농악단서 본격 활동
‘마당풍물놀이’ 창단… 아시안게임·올림픽 참가
1998년 ‘광명농악보존회’ 설립… 맥 잇기 위해 노력
“광명농악 전수관 설립해 무형문화재 전승 매진할 것”

 

 

 

광명농악은 수도권 서남부의 대표적 농악이다. 약 450년전부터 철산리, 소하리, 아방리 등지에서 성행하던 농악놀이를 1990년부터 발굴하기 시작, 1994년 민속예술축제를 계기로 재현했다. 특히 경기농악의 중심적인 가락과 짜임새가 모두 담겨 있다. 또 전체적인 놀이의 흐름이 빠르며 박진감 있고, 판굿의 구성이 변화무쌍하게 짜여져 하는이와 보는이의 신명을 담아낸다. 기본적으로 흰 옷차림에 삼색띠를 두르거나 마을에 따라 청색 조끼를 입기도 한다. 쇠가락으로는 길군악칠채, 덩덕궁이장단, 짠지패가락, 두마치(자진마치), 쩍쩍이, 굿거리 등이 쓰이며 이 가운데 길군악칠채는 경기농악에만 쓰이는 가락이다. 현재 전문농악집단과 동아리 형태의 동호인들이 황성한 활동으로 건전한 놀이문화로 정착시키고 있으며 1997년 경기도무형문화재로도 지정됐다.
 

 

 

 

 

“어린 시절 무심코 접한 농악 가락에 이제는 제 인생을 태웠습니다.”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 보유장인인 임웅수(56)씨는 농악에 대해 이렇게 운을 뗏다.

16세기 이후부터 지금의 광명시 소하동과 학온동 일대에서 전승돼 오던 광명농악은 농업과 함께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모심기와 논매기 등을 할 때 빠른 장단에 따라 흥을 높여주고 협동심을 고취하게 만든다는 데서 비롯해 추석과 단오, 정월대보름 등 각종 명절에 풍년을 기원하면서 불리게 됐다.

농촌이었던 소하동과 학온동 등은 두레농악이 정착해 있었고, 지금은 도시가 됐지만 그 전통을 임씨가 받아 전승 중에 있다.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난 임씨는 논농사가 한창이던 1962년 어느 날, 농사일을 하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농악을 접했다.

농사일이 주된 일이었던 당시 상황에 따라 중학교 입학 때에도 자연스럽게 농악놀이를 즐기며 성장했다.

 

 

 

 

그는 “처음 들었던 꽹과리 소리에 맞춰 어깨가 움직여지면서 흥이 났습니다. 근데 그게 제 인생을 움직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같은 마을에 살던 친구들과 논밭에서 뛰어 놀았지만 주변에서 들려오던 풍악 소리에 절로 어깨를 흔들다가 꽹과리 소리를 듣고 쳐보게 됐는데, 그것이 평생의 연을 맺게 된 것.

이후 중학교를 거쳐 입학한 공주 농업고등학교에서 그는 친구들과 다를 바 없이 농업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친구들처럼 농생명 공학, 잠업 등으로 진로를 결정하지 않았다. 누구나 농고에 오면 생활 농업인이 되기 위해 이 같은 전공을 선택하지만 정작 자신은 농악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자식 키운다는 마음으로 직접 공들여 농작물을 키워내는 것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번 마음 속으로 들어온 농악을 쉬이 잊지 못했다.

주변에서도 농업인이 되는 게 낫지 않겠냐며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어린 시절 절로 흥을 불러일으키던 꽹과리 소리를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것.

 

 

 

 

그는 그렇게 농악으로의 진로를 결정했다.

농악을 전공으로 고교를 졸업한 그는 한국민속촌 농악단에서 약 4년 동안 전문 농악인으로 활동하게 됐다. 스포츠 선수에 비유하자면 고교 졸업 직후 프로 데뷔를 한 셈.

민속촌에서 근무하며 농악 공연을 할 때에는 힘든 줄 몰랐고 잡념 없이 장단에만 몸을 맡겼다. 농악단에서 지내는 동안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온통 농악 소리에 취해 있으니 당시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같은 그의 농악사랑은 지금도 변함없다. 심지어 핸드폰 통화연결음마저 농악이다.

그렇게 민속촌에서 정신없이 농악에 빠져 있던 중 군에 입대했다. 휴가를 나올 때마다 곁에 늘 두고 있던 꽹과리를 찾아 잡아보면 마치 제2의 심장이 있는 것처럼 느끼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군 전역 이후 1986년, ‘마당풍물놀이’ 농악팀을 창단해 함께 하루 3~4번 가량의 전국 공연에 나섰다. 그 동안 농악 소리에 몸을 맡겨왔던 만큼 우리 전통 소리를 혼자서 경험하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는 결심에 따른 것.

1986년과 1988년, 국내에서 치뤄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주경기장에서 30년 가까이 연을 맺어왔던 그 농악을 세계인 앞에서 선보이게 된 셈.

‘여기까지 왔다’라는 성취감보다는 무대에 올라가 ‘후회없이 흥겹게, 흥이 나게 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앞섰다고 그는 전했다.

무대 위에 올라서자, 더 이상 잡념은 없었다. 꽹과리 소리, 농악 소리 뿐. 몸도 더 이상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장단에 몸을 던졌다.

소리따라 흔들리는 몸, 땅에 서 있는 것인지, 구름위에 떠다니는 것인지 알길 없이 오로지 농악소리 뿐이었다. 매우 강렬했던 그 당시 농악과 하나된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게 임씨의 설명이다.

그렇게 농악에 빠진 그는 수년 간 완전히 무아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사절단까지 맡게 됐다.

국가적인 행사를 치른 후 1990년부터 광명농악을 시작하게 됐다. 바로 ‘서도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인 이춘목씨가 임씨를 찾아와 광명 농악 보존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하면서부터다.

 

 

 

 

광명농악과 연을 맺게 된 임씨는 직접 노인정 등을 돌며 익히고 연구했다.

광명농악은 굿머리, 내돌림법구놀이, 앞당산놀이, 채오방진, 뒷당산 놀이 등의 순으로 14개 놀이가 진행된다. 기본 편성으로는 영기2·농기·쇄납·쇠·징2·북4·장고6·벅구12(상벅구, 부벅구·끝벅구)·무동(상무동, 부무동·끝무동)·사미(상좌로 분장한 소년. 속칭 중애)로 편성된다.

또한 웃다리 농악인 광명농악에는 무동놀이에서 깨끼춤과 동리·삼동고리·곡마단·맞동리 등이 구성돼 있다.

그렇게 밤낮없이 연구하면서 정립을 거듭, 1998년 드디어 광명농악보존회를 설립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광명농악에 터를 잡았고, 앞으로 ‘경기도 광명 농악전수관’을 설립해 광명농악의 맥을 잇고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광명농악 전수관을 설립해 광명농악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전통을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며 무형 문화재에 대한 깊은 사랑을 전했다.

이어 “광명농악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무형 문화재는 모두 우리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위대한 정신의 힘”이라며 “지금까지 많이 사랑해주셔서 감사하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무형 문화재 전승에 더욱 매진할 것”이라고 전했다.

임웅수 광명농악 보유자는 모두 68종목에 달하는 경기도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모임인 ‘경기도무형문화재총연합회’의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광명농악을 포함해 경기도무형문화재의 보호·교류·발전을 위해 ‘경기도무형문화재 통합전수관’ 설립을 목표로 안팎으로 뛰고 있다.

/조주형기자 peter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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