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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자작나무의 말

 

백석을 좋아한다. 풍부하고 정겨운 이북의 말맛이 좋다. 그가 아니었으면 다양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우리말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켕켕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그의 시 <백화(白樺)>다. 백석의 고향 산에 흔히 있던 나무. 시를 읽으면 겨울의 시린 숨이 코끝까지 빨갛게 얼릴 듯하다. 마을을 감싸는 산자락엔 하얗게 자작나무가 서 있고 저녁의 초입 굴뚝으로 연기가 보일 것 같다.

감칠맛 나는 그의 다른 시들과 달리 이 시는 깔끔하다. 군더더기 없이 쭉 뻗은 자작나무처럼 말이다. 길게 말하지 않아도 여우가 있을법한,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이 보인다. 문살, 기둥, 메밀국수, 박우물도 따라온다. 무늬와 재질이 좋아 가구나 집 재료로 쓰고 장작으로도 좋고 수액을 마실 수도 있는 여러모로 쓸모 있는 나무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작나무가 최고의 나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자작나무는 아름답다. 수직으로 뻗은 곧은 수형. 매끈하고 하얀 표피. 하늘로 치솟은 가지. 연둣빛 새 잎이 나는 봄에도, 청량한 초록의 여름도 멋있다. 노란 잎이 물드는 가을은 어떠하며 겨울은 또 얼마나 수려하고 운치 있는지. 잎사귀 없이 눈 위에 처연하게 서있는 모습이라니.

철학이 있는 나무다. 생이 짧아서 둥치를 늘리고 몇 백 년을 넘기며 나이를 먹는 여느 나무와 달리 기껏 100년을 살고 다른 나무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얼마나 오래 사는가보다 얼마나 가치 있게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나무다. 의미 없는 천년이 무슨 소용이냐고 천년을 살 것 같은 우리에게 말하는 듯도 하다.

나무의 귀족이다. 나무에도 신분을 매긴다면 도도하고 반듯한 귀족이라 하겠다. 북풍에 흔들리지 않는 고고한 자태. 하늘을 향한 우아한 심성. 욕심껏 가지를 내지도, 무리하게 영역을 넓히지도 않는다. 오지랖 넓은 참견도 없다. 오직 자신의 수양만 힘쓸 뿐이다. 따뜻한 지역을 마다하고 추운 북쪽을 선택한 것도 그만한 결기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자작나무라 하면 스승이 생각난다. 나의 스승 일현(一玄). 자작나무의 심성을 가진 그분도 북쪽이 고향이다. 정원에 자작나무 세 그루를 심으셨다. 자작나무를 보며 고향 함경도에 대한 향수를 가만가만 달래셨을 것이다.

1.4 후퇴 때 원산에서 큰누님 손을 잡고 배에 오르셨다. 저서 『하늘 잠자리』에서 ‘언제 다시 고향에 가는 날이 온다면 나는 제일 먼저 그때 그 자작나무 숲으로 가겠다. 그리고 자작나무 밑에서 살다가 자작나무 껍질에 싸여서 자작나무 곁에 잠들었으면 싶다.’던 스승. ‘언제 다시’란 말에 가슴이 아리다. 기차를 타고 북으로 갈 수 있는 날이 돌아가시기 전에 오기는 올까?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작나무는 참 멋지지 않니? 사람으로 치면 미인이야. 너처럼 피부가 하얗고 단풍든 잎사귀는 네 머리칼처럼 노랗고 예쁘지.”

스승이 하셨던 한 마디에 자작나무가 내게 걸어왔다. 그것은 오로지 나를 위한, 나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자작나무라는 말을 들 때마다 상상의 눈은 자작자작 발자국을 세며 숲으로 갔다. 노란 머리를 나풀거리며 걸어가는 내 뒷모습이 보일 듯했다. ‘지안아’ 하고 부르는 스승의 목소리도 머릿결을 타고 나붓나붓 따라 올 것 같았다.

지금쯤, 자작나무숲은 노랗게 물들고 있겠지. 바람이 나무 사이를 휘감으면 노란 잎들이 빙그르 돌며 떨어지겠지.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나도 북녘의 숲으로 가야지. 가서 자작나무가 되어야지. 그러면 나는 발이 땅으로 박히고 팔이 길어지고 머리는 잎사귀가 되어 당신이 했던 노란 말들을 쏟아내겠지. 당신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한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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