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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뜨락]정조의 불취무귀(不醉無歸)

 

영조는 재위 40여년 동안에 금주령을 내릴 정도로 백성들의 살림이 팍팍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뒤를 이은 조선의 제22대 정조는 어머니 회갑연에서 불취무귀(不醉無歸)라는 새로운 파라다이스를 말한다.

신하들이나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기술자들과의 술자리에서 정조는 늘 첫 마디로 했다는 이 한마디를 기억해야 한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이는 양반의 권위의식이 하늘에 닿던 철저했던 계급시대에 조선 하늘 아래 제1인자는 기술자 ‘따위’의 천민들과 어울려 마음껏 술을 마시며 ‘불취무귀’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정조의 사랑을 받았던 다산이 유배생활 중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춘당대에서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좋은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이 곤드레 만드레 되어 정신을 잃고 혹 남쪽을 향해 절을 하고 더러는 자리에 누워 뒹굴고 하였다”며 임금과의 술자리의 진풍경을 기록했다. 왕에 대한 예의범절이 지중한 엄격한 시절에 이런 장면이 있었던 것이다.

예의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지난 날 여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 것이 예가 아니요, 여자가 글을 가까이 하는 것도 예가 아니었고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여자가 남자를 이기려 달려 드는 것도 예가 아니었다.

지금 세상에서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성차별이라고 비난을 면치 못하고 몰매를 맞을 것이다.

동트면 일하고 해가 저물면 일을 마쳐야 했던 농경문화와 하루 온종일 기계를 가동해야 하는 산업사회의 문화와의 차이는 예의 차이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

예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예의 본질은 시대의 변화를 초월해 존재한다. 정조의 ‘불취무귀’ 정신을 거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임금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자 하는 어진 임금의 마음은 그 자체로 신분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였을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세월이 가도 우리 시대 노무현의 탈 권위주의를 정신만은 오래도록 기억한다.

하루가 멀다고 이른바 ‘갑의 횡포’가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정조는 ‘불취무귀’를 부르짖으며 을의 마음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갑’이었다.

우리 시대의 갑인 여당은 을인 야당도 보듬어 보라, 비록 타박만 하고 매사에 부정적인 상대도 헤아려 보려는 뱃짱있는 포용이야말로 상대를 감동케 해 국정에 동반자가 되게 하려는 큰 정치의 밑그림 일 것이다.

반년 남짓한 총선을 의식해서 인지 여야의 날선 공격과 대립은 날이 갈 수록 더욱 격렬해져 간다. 한국 사회가 두 쪽이라도 날 듯 한 그 대결구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 이때, 정조 임금처럼 대승적인 탕평의 정치를 해 봄직하다.

여야 영수가 회담도 하고 맥주 한잔 나눠 마시며 민생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낭만이 있는 정치와 밤세워 끝장 토론에서 얻은 결과를 어깨 동무하며 기자 회견 하는 그런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기대하면 넘 앞서 가는 것은 아닐까.

원효도 이미 천년전에 사회 통합에 기여한 원융회통의 정신으로 신라의 분열을 미리 막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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