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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가을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병이 찾아온다. 몸에는 이렇다 할 증세가 없는데도 무력증에다가 어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심란해진다. 남들은 오히려 생기가 나서 팔팔 뛰며 청춘이 되살아난다는데 말이다.

늦 코스모스가 가느다란 줄기에 몇 송이 매달려 하늘거리는 모습에서 마음이 새록새록 저려 온다. 하물며 보도에 가득히 쌓인 은행잎을 밟기라도 하는 날이면 가는 목적도 시간관념도 잊은 채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된다. 붉다 말고 엷어진 단풍나무 곁을 지나다 옷에 고운 색깔이 배면 황홀해서 가슴을 새록새록 앓는다.

가을에 오는 병의 원인은 많기도 하다. 공해에 찌든 하늘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가을 하늘은 역시 높고 푸르다. 그런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깊이 잠적하고픈 생각으로 병이 난다. 저녁노을은 가을이라야 제 빛깔이 난다. 연한 주홍색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곳에 붉은색이 서너 줄 아로새겨진 노을이 줄줄이 내게 뻗쳐 왔어도 손으로 잡지 못해 안타깝다. 사계절 중 가을에 뜨는 보름달은 유난히 사색적이다. 미루나무 가지에 걸려 절구질을 멈춘 옥토끼 한 쌍이 폴짝 뛰어 내릴까봐 가슴은 콩당거리고.

고추잠자리가 마당에서 맴을 돌면 나는 벌써 수십 년 뒤로 돌아가는 병을 앓는다. 옛날의 시골 정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게 되면 더욱 진하다. 초가지붕 위에 호박이 옹기종기 매달려 있고, 마당에는 빨간 고추가 가을볕을 즐기는데 감나무 꼭대기에 남은 홍시를 아이들이 댓가지로 따느라 발꿈치를 들고 안간힘을 하면 나의 지난 모습이 선해 병이 난다.

고추가 널려 있는 멍석 옆에서 가을볕을 쬐며 오래도록 동무들과 소꿉놀이하던 그리움은 의사의 치료로는 낫지 않는 병이다.

낙엽을 휘몰아 가는 바람결에 지나가는 소녀가 짧은 치마를 여미면 가슴은 또 콩닥콩닥 뛰어 아프다. 딸 같은 소녀가 행여 치마를 홀랑 뒤집혀 뭇사람의 시선을 끌게 될까 봐 겁이 나서다. 정작 소녀는 번번이 치마를 여미면서도 부끄러움은커녕 여유롭고 태평한데도.

조각구름이 제 마음대로 흘러가면 같이 동무를 해주지 못해서 아프고, 한 통의 편지가 오는 날은 발신인의 고마움에 마음을 빼앗기느라 앓는다. 허름한 집 마당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손을 멈추고 울타리 너머로 목을 느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에서도 아픔이 온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날리는 낙엽 따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곡목조차 모르는 노래에서 구름 따라 산을 넘고 강을 지나도 내 쉴 곳도 머무를 곳도 찾지 못한다는 가수의 음률에서 심히 가슴이 아린다.

온종일 소리 없는 가을비가 내린다. 봄에 내리는 비는 아지랑이가 일렁이듯 여리게 내리고, 여름에 오는 비는 젊은이의 기백처럼 힘차게 쏟아진다. 그러나 오늘의 가을비는 오는 듯 마는 듯 보슬보슬 내린다. 우산을 개고 걷기로 한다. 머리칼 위로, 옷깃 위로, 작고 말간 물방울이 송알송알 맺힌다. 옷에 베지 않고 머물렀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너 방울이 떨어져 조마조마하여 병이 난다. 비로 인해서 얻는 가장 큰 병은 우산 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으려고 우산살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다 뒤돌아보며 떨어질 때가 가장 깊다.

황금물결이 보고 싶어 들에 나갔으나, 벼는 오간 데 없고 황량한 들판에 벼 포기만 덩그러니 남아 부서진 허수아비를 위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면 가을 병은 더욱 깊어 간다. 그러다가 갈대 꽃대에 메마른 바람이 스쳐 씨앗을 한 올 한 올 데리고 달아나면 병은 곱으로 더해 간다.

해마다 오는 가을 병이 심신에 누적되었더라면 지금은 큰 병을 얻었겠지만, 흰 눈만 내리면 언제 그리 했느냐며 감쪽같이 사라지기에 가을 병은 싫지가 않다. 파란 하늘이 사라지고 아침저녁 찬바람이 소맷자락을 파고드는 횟수가 잦을 걸 보니 올해의 가을 병도 수명이 다해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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