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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세상]‘한국영화 100년’과 ‘아리랑’ 논란

 

 

 

 

 

‘한국영화 100년’ 기념 세미나, 음악회, 상영회, 전시회 등이 10월 곳곳을 채웠다. 한국영화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겠다는 취지는 시비할 바가 아니지만, 왜 ‘100년’이라고 하는지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한국영화’ 대상과 범위를 무엇으로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정리하지 못한 점, 중요 쟁점에 대한 미확인 등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남겨둔 채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항일정신을 표현한 명작, 영화인 나운규를 위대한 영웅으로 만든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무성영화 ‘아리랑’(1926)을 한국영화로 볼 수 있는지, 나운규가 그 영화를 감독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지나간 것은 ‘100년’ 잔치가 실속 없이 풍악만 요란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리랑’은 여전히 논란 대상이다. 감독이 나운규인가, 항일의식을 표현한 저항영화인가라는 두 가지 점이 핵심이다. 1926년, 일본인이 세운 영화사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아리랑’은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지금은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영화의 정확한 내용이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태다. 당시 신문, 잡지 등에 소개된 기사나 광고, 영화를 보았던 관객이 남긴 회고담을 비롯한 자료를 묶어 ‘최고의 영화’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연을 맡아 당대의 스타가 된 나운규와 같이 활동했던 이경손, 이규설, 윤봉춘 등의 원로 영화인들이 남긴 개인적 일화는 객관적 자료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내가 직접 봤다’는 주장은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무게를 부여하며 전설을 사실로 보증하는 역할을 했다.

오랫동안 ‘아리랑’ 연출은 나운규가 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당시의 여러 자료에는 일본인 쓰모리 슈이치(津守秀一)를 감독으로 표기하고 있다. 나운규를 무성영화 시대의 영웅처럼 평가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아리랑’이 일본의 한반도 통치에 저항하는 독립 의지를 담은 ‘민족영화’라고 보기 때문이다. ‘아리랑’ 원작, 주연, 감독을 나운규가 했다고 해야 ‘민족영화’로서의 구색이 맞고, 그런 정신이 일제시대 한국영화의 바탕에 흐르고 있었다는 식으로 보겠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감독이 일본인으로 표기된 것은 나운규가 총독부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을 대신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정설처럼 뒤따라 다닌다. 일제 시대에 제작된 영화 중 검열 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감독을 대신 내세웠다는 사례는 ‘아리랑’이 유일하다. 그나마 객관적인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야사로 떠도는 풍문일 뿐이다.

영화의 국적이나 소유권은 배우나 감독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사가 어떤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특정한 인물이 주연이나 감독을 했다고 그 영화를 개인의 소유라고 할 수 없다. 제작사가 모든 권리를 가지기 때문이다. ‘아리랑’에서 나운규의 역할이 컸다고 해도 그 때문에 나운규가 영화의 소유자 또는 권리자라고 할 수는 없다. ‘아리랑’을 제작한 영화사는 일본인이 세운 회사다. 일본인 영화사에서, 일본인이 제작, 감독한 영화를 두고 항일 의식을 담은 민족영화라고? 앞뒤 맥락이 자연스럽지 않다.

항일 의식을 담은 것이라면 검열이나 상영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켰을 만도 하지만, 제작 당시는 물론 해방 될 때까지 어디에서도 제재를 받은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제작 당시에는 사전에 시나리오 검열을 했고, 영화 상영 때에는 경관이 임석하여 극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감시했다. 일본에 항거하는 내용이 포함됐다면 사전 검열에서 관련 부분이 삭제됐거나 상영 금지 조치를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리랑’은 일본에서도 상영을 했고, 재일 조선인을 위문하는 행사용 프로그램으로도 여러 번 상영되었다.

공개적인 논의도 없이, ‘아리랑’은 한국영화의 대표작, 나운규는 한국영화의 위대한 영웅으로 남아 있다. ‘한국영화 100년’을 맞기는 했지만, 그 역사의 진위나 논란은 여전히 미결의 숙제를 정리하지는 못한 상태다. ‘미래의 100년’에서는 정리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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