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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오랜 세월 지켜왔던 화각공예, 열심히 이어갈 것”

소중한 유산, 경기도 무형문화재를 찾아서 3. 화각장 전수교육조교 한기덕

쇠뿔 이용하는 우리나라 고유 각질공예
귀한 재료·까다로운 공정으로 2곳만 전승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9호 故 한춘섭 선생
나전칠기 배우던 중 화각의 세계로 빠져

20년 전 기계공학도 꿈꿨던 한기덕씨
대학 졸업 직후 아버지 권유로 화각 배워
성남서 공방 운영 ‘화각닷컴’ 통해 소통

“이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화각공예
우리 전통 지킨다는 책임감 느낀다”

 

 

 

화각공예는 회화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는 각질공예로 나전칠기와 쌍벽을 이루는 고유의 전통왕실공예이자 동양공예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이한 공예다. 이 공예의 특징은 투명도가 높은 소뿔을 종이보다 얇게 펴 각지(角紙)를 만든 뒤 뒷면에 오색찬란한 단청안료(丹靑顔料)로 갖가지 문양을 그리고 채색해 만들고자 하는 목기물 백골(白骨) 표면에 붙여 장식하는 것이다. 색채는 적·청·황·백·흑 등 오색을 기본으로 하여 비교적 명도가 높은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실내분위기를 화사하고 생기있게 해준다. 또 재료가 귀하고, 공정이 까다로워 생산이 많지 않다. 귀족층들의 기호품이나 애장품으로 이용되고, 일반대중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희귀 공예품이다. 화각은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순수 한반도에서 기원한 예술로 그 뿌리는 고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화각 공예는 전 세계에서 단 2곳만이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이곳이죠.”

쇠뿔을 종이처럼 얇게 펴 안쪽에 그림을 그린 후 색을 입히고 붙이는 종합 예술 화각.

화각은 쇠뿔을 분리해 건조시키고 이를 얇게 펴내는 등의 가공 작업, 여기에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히는 작업, 또 옻칠을 해 그림을 보여주는 작업이 모두 한데 모여 하나의 공예품으로 탄생된다.

어느 과정 하나라도 정성이 부족하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단순 공예가 아닌 종합 예술로 불린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순수 한반도에서 기원한 예술로 그 뿌리는 고대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화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2명 뿐이다.

그 중 한명이 바로 고(古) 한춘섭 선생의 아들 한기덕(46) 씨다.
 

 

 

 

 

지난 1999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된 고 한춘섭 선생은 1949년에 태어나 15살 전후 공예에 발을 들였다.

어릴 때부터 무엇인가를 만드는데 남다른 소질과 재주를 보였던 그는 우연찮은 계기로 나전칠기 공방에 갔다가 공예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 한 선생은 3년도 채 안돼 나전칠기 작업의 기본을 모두 익히고 이를 응용하는 단계까지 뛰어넘었다.

하지만 진짜 인생의 길은 우연한 곳에서 다가왔다.

나전칠기를 배우던, 채 스무살도 안된 앳된 청년은 화각공예를 하던 고 음일천 선생을 만나 화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청출어람의 실력이었던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전칠기 공방에서는 그를 보내주기 싫어했으나 결국 스승을 설득,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화각의 세계로 들어섰다.

그렇게 시작한 한 선생은 쇠뿔을 통해 재탄생되는 공예품을 보면서 나전칠기에서의 열정을 가득 보탰다.

계절이 바뀌는지 볼 새도 없이 3년이 지나면서 군대에 입대했다.

전역 이후 다시 공방으로 돌아오자 묵묵하게 자신을 인도해준 스승은 그 사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그렇게 홀로 화각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0년 동안 화각을 다루던 그는 1997년 드디어 무형 문화재 전통 공예 특별전을 열었다.

이어 2001년에는 독일 코블렌츠 공예 박람회 및 프랑스 마르세이유 한국 공예박람회 초대 작가로 선정됐다.

이후에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선물할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화각 공예에서 왕성하게 활발하던 중 그는 지병으로 3년 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혼은 아들인 한기덕 씨의 손을 거쳐 나온 화각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1974년 태어난 한기덕(46) 씨는 어려서부터 햇빛도 들지 않는 작업장에서 묵묵히 작업하던 아버지를 도왔다.

처음부터 화각 장인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기계 공학과 수학에 재능이 있었던 한씨는 집안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기계공학과로 들어선 그는 대학에서 뉴턴의 중력 법칙 등 역학에 머리가 트이면서 밤샘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담임교수로부터 추천서를 받기에 이른다.

주변의 그런 성화에도 불구하고 IMF로 인한 맹풍을 피하지는 못했다.

IMF로 국내 제조업 및 설비업계가 줄도산하자 한 씨 역시 자신의 인생도 밝지 못하겠다는 것을 보고 공무원 준비를 하기도 했다.

대학교 4학년 때는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미래에 대비하고자 했다.

대학 졸업 직후 아버지로부터 권유를 받아 아버지를 따라 화각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기계공학도였던 그에게 화각이라는 예술 작업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는 “계량화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과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순전히 경험을 통한 직관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을 보고 아버지에게 대들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정량화를 연구하던 그였기에 오랜 경험만으로 작품을 만든다는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자간 갈등의 골도 점점 깊어만 갔다.

결국 그렇게 6개월 만에 집을 뛰쳐 나온 그는 이를 악물고 3일 만에 설비업체에 취직했다.

IMF로 인한 실업난이 컸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닐 터였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다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는 그는 기계공학 연구원으로써의 삶을 마치고 다시 아버지를 찾아 지난날의 잘못에 용서를 구했다.

그러고는 아버지인 고 한춘섭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밑에서 군말없이 화각을 배웠다.

아버지 역시 아들이 내는 아이디어와 의견을 묵묵히 들었다.

3년이 지나자 아버지는 화각 공방의 전권이라 할 수 있는 ‘회계’를 모두 아들에게 맡겼다.

장부를 받은 한씨는 이제 자신도 ‘중책’을 맡았다면서 기뻐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화각 작품의 판로를 찾는 것이 만만치 않았던 것.

게다가 막상 받은 회계 장부에 앞서 화각 공예도 연구해야 하는 양이 엄청났다.

우선 화각 공예의 주재료는 바로 소뿔이다.

소뿔 등을 잘라낸 후 그 안의 뼈를 뿔과 분리한다. 유기물을 제거함과 함께 분리과정을 거친 공각은 얇게 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얇게 펴는 것은 과유불급의 원칙이 적용된다.

다시말해 0.5㎜ 안팎의 두께로 펴야 하는데 이때 너무 얇으면 단청 작업할 때 물감의 두께로 인해 내구성이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너무 두꺼우면 채색이 안되거나 채색됐다해도 겨울철에 쉽게 갈라지는 등의 문제도 발생한다.

주 재료인 소뿔 자체가 유기물질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공각을 만들어 내는데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린다. 20일 동안 말려낸 각지에 그림을 그린 후 그림 그린 부분을 붙이게 된다. 이때 각지에 그린 그림이 밖에서 봤을 때 비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 각지의 두께를 얼마나 잘 만들어 내느냐가 굉장한 정성인 셈이다.

그는 각지 두께의 공정 과정을 거치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새삼스럽게 느꼈다고 전했다.



현재 한기덕 씨는 성남시 중원구 갈마치로에서 화각공예 공방을 운영 중이다.

아버지로부터 다시 한번 화각 공예를 배우면서 당시 손수 제작했던 화각 공예 인터넷 홈페이지인 ‘화각닷컴(www.hwagak.com)’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화각 공예를 다시 시작하면서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도 만났고, 두 자녀도 생겼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마음이 이제는 매 순간 느껴진다고 그는 전했다.

한 씨는 “이제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화각 공예를 볼 때마다 어린 시절 햇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공방에서 아버지가 가족들을 부양하면서도 힘든 내색 하나 내지 않았다며 아직도 죄송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20년 전, 기계공학도를 꿈꿨던 한 씨는 이제 아버지의 혼을 따라 화각인이 됐다.

또 우리 전통을 지킨다는 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책임감도 느껴진다고 한다.

한기덕 씨는 “아버지가 오랜 세월 지켜왔던 화각 공예, 이제는 그 짐을 제가 지려고 합니다. 정말 열심히 잘해볼 겁니다”라고 말했다.

/안경환기자 jing@

/사진=조병석기자 c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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