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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松시선]조선 장수들의 의리 (上)

 

 

 

1624년 3월, 조선은 내란에 휩싸였다.

인조반정의 주체였던 평안병사 이괄이 국경을 방어하던 1만2천명의 최정예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는 놀라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괄의 반란은 불신이 초래한 내전이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당시 군대를 진두지휘했던 주역이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시간을 어긴 김유는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이괄은 이등공신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병조판서를 기대했으나 변방의 방어를 책임지는 평안병사에 임명되었는데,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이귀가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했던 것이다.

가까스로 반란은 평정되었지만 왜란 이후 총력을 기울여 육성한 평안도의 정예로운 군대가 거덜나고 말았다. 여기에다 변화를 읽지 못한 조정의 친명정책은 결국 청을 자극하여 연거푸 전쟁(정묘·병자호란)을 부르고 말았다.

끝내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 주었다. 문화국으로 자부하던 조선의 자존심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소현세자 대신 왕위에 오른 효종은 북벌이라는 정책으로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효종은 재위(1649~1659) 10년 동안 군비를 증강하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효종이 북벌의 선봉으로 발탁한 장수가 이완(1602~1674)과 류혁연(1616~1680)이다. 인조반정(1623) 이후 군부 최고직인 훈련대장은 척신들이 도맡았는데 효종은 이러한 관례를 깨고 무반 이완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였다. 또 대신들의 반발을 누르며 수원부사 류혁연을 승지로 발탁했다가 얼마 후 어영대장에 임명하였다.



이완의 결단, 류혁연의 의리

이완과 류혁연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실행할 때 수레의 두 바퀴였다.

정치적으로 이완은 서인, 류혁연은 남인계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파에서 벗어나 무인의 의리로 뭉쳐 임금을 보좌하며 양란으로 풍비박산된 군대를 정비하고 강화하는데 헌신하였다.

하지만 끝내 북벌이 실현되지 못하고, 효종 사후 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을 것인지를 놓고 서인과 남인이 첨예하게 대립한 예송논쟁에 가려 이들의 업적도 묻혀버렸다. 그러나 이완과 류혁연을 기억해야 할 충분한 까닭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정치세력들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훈련도감, 총융청, 어영청, 호위청 같은 여러 군영의 대장들은 서로 기찰을 풀어 상대의 약점을 잡고 있다가 권력싸움에 이용했다.

이런 풍토를 개탄하던 이완과 류혁연이 만나 서로 기찰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두 사람은 때론 정책을 놓고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지만 평생 이 약속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훈훈하고 흥미로운 일화가 류혁연의 문집인 ‘야당유고’에 실려 있다. 이것이 두 사람을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이유이다.

현종대 후반에 이완은 훈련대장에서 물러나 우의정에 올랐다.

이때 이완은 자신의 뒤를 이어 훈련대장에 임명된 류혁연을 불렀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용했던 활과 검, 투구와 갑옷을 물려주었다. 마치 스승이 제자에게 도통을 전하는 의발(衣鉢)과 같은 의식이었다. 이후 이것은 전통으로 굳어져 류혁연은 신여철에게, 신여철은 장붕익에게 활과 검을 대물림하였다. 이들이 활동했던 현종·숙종대는 하루아침에 정권이 뒤바뀌는 ‘환국(換局)’으로 숱한 선비들이 목숨을 잃고 유배되었던 정치적 혼란기였다. 이같은 혼돈의 시대에 군부가 환국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던 배경에는 이완과 류혁연의 바위같은 결속과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일을 서슴지 않는 살얼음판 정치현실에서 당색을 따지지 않고 후임 장수에게 자신의 분신 같은 활과 검을 물려준 사례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미담이다. 이것이 이들을 역사에서 불러내야 할 두 번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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