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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정장 퇴출시키기

 

 

 


12월의 문을 연다. 이 문을 닫을 즈음 한해를 통으로 과거의 서랍에 넣어야 한다. 올해 다짐을 한 것이 얼마 전인데 시상식이니 송년회니 연말 초대장이 책상에 쌓인다. 서로 짜 맞춘 듯 일주일 간격이다. 더러 두 건의 모임이 겹쳐 부산하다. 아무 성과 없이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른 것을 후회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모임에 입고 갈 옷도 걱정이다. 작년 모임에 입었던 옷을 올해 또 입고 가기가 그렇다. 매년 같은 고민은 옷이 많아도 쓸 만한 옷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찾아보면 나올지 몰라 옷장을 연다. 포화상태인 옷장은 기다린 듯 스웨터를 발밑으로 툭 떨어뜨린다. 더 이상 아무거나 끌어안을 수 없다는 엄포다. 결국 주저앉아 옷장을 정리한다.

구석에 있는 옷들을 꺼낸다. 몇 년이나 햇빛을 보지 못한 유행 지난 옷들이 촌스럽다. 십년 전의 유행어를 들을 때처럼 웃어야 될지 말아야 할지 어색하다.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를 보는 기분이라고 하면 맞을까? ‘르망’이나 ‘세피아’, ‘레간자’. 그때는 분명 세련되고 멋졌는데 말이다.

버리는 일이 쉽지 않다. 유행이 지난 정장은 특히 더 그렇다. 다시 입을 것 같아 망설인다. 그 옷을 입던 날의 기억과 얼마를 주고 샀는가를 생각하면 장롱을 머리에 이고 잘지언정 차마 버리지는 못하겠는 것이다. 일 년에 몇 번 입지도 못할 옷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사고 꼬박꼬박 드라이를 맡기고 오염이라도 묻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만사 제치고 세탁했던 옷.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 알려주던 바로미터였다. 내 사이즈를 귀신같이 기억해서 살이 좀 오르면 어깨가 끼고 지퍼 올리기가 수월치 않았다. 몸이 날씬할수록 모양새가 나는 정장은 한 치의 게으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한 치의 차이는 절묘해서 55를 66으로 늘이면 옆집 아줌마처럼 너그럽게 만들고 55를 44로 줄이면 연예인처럼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나를 우아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틀을 끼운 듯 목을 곧추세우고 어깨에 각을 세우며 나는 얼마나 격이 있게 행동했던가. 정장은 나를 근사하게 포장하는 날개였다. 나의 현재를, 권위를, 명예를, 혹은 가능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었다. 가격이 높을수록, 사람들에게 낯익은 브랜드일수록 나의 존재가치는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정장을 입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장이란 첫 단추부터 평사원인 마지막 단추까지 쭉 이어진 상명하달. 슈트와 바지, 재킷과 스커트처럼 상의와 하의가 정확한 상하관계였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소매 끝처럼 박음질이 단단해 보여야했다. 실밥 풀린 밑단처럼 허술해보였다가는 후배에게 밀리기 딱 좋았다. 날선 깃처럼 매일이 조마조마했지만 정장은 사람을 반듯하게 보이고 능력 있어 보이게 했다. 정장을 입는다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으로 제도권에 잘 안착했다는 뜻이었다. 나는 정장을 입고 인텔리처럼, 또는 유능한 직장인처럼 굴었다.

한물 간 정장을 옷장에서 퇴출시킨다. 이제는 가벼워지고 싶다. 어깨에 넣었던 뽕(pad)을 빼듯, 권위라든가 브랜드라든가 하는 거품을 빼고 싶다. 나의 격을 올리는 것은 내 몸에 붙은 라벨이 아니라 내가 빚어낸 삶의 약력들이 아니겠나 싶다. 어디를 다녔다는 꼬리표, 명품 시계나 가방, 자동차로 나를 말하기보다 실력이나 인격으로 명품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싶은 것이다.

옷 정리를 하며 하나 둘 벌여 놓은 일의 마무리를 셈한다. 다가올 시간의 소매를 눈대중으로 어림해보지만 실제 닥치면 턱없이 모자랄지도 모른다. 경험상 마침맞게 네 귀퉁이 포개지는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 재단하기 어려운 미래는 더더욱 마름질이 서툴 것이다.

그렇더라도 한 해가 가고 오는 길목에서 정리는 해야겠다. 유행 지난 정장과 기한 지난 권위와 고정관념을, 낡은 옷과 늙은 사고를 꺼내 올해를 정리한다.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리고 내년의 문을 열어야겠다.

그나저나 뭘 입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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