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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전 대우그롭 회장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그 중 대표적인게 ‘샐러리맨 신화’의 주역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이보다 인재 확보를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리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나는 버는 재주는 있으나 쓰는 재주는 없으니, 불우부진((不遇不振)한 분야에 도움이 되도록 써달라.” 1980년 김 전 회장이 기초 학술진흥사업에 사용해 달라며 대우재단에 2백억원을 내놓으면서 했던 말이다. 재단은 1983년부터 2004년까지 기초학술분야 1천500여건의 과제를 지원했고, 그중 580권의 학술총서를 출간됐다. 당시 대우학술총서의 저자가 된다는 것은 학자들에겐 자랑으로 여겨질 만큼의 권위를 가졌다. 대우재단이 국내 기초학문분야에 거의 유일하게 지원의 손길을 내민 재단 이어서다.

김 전회장은 아주대와 병원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1977년 대우실업 사장시절 “교육 사업을 통해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고급 인력을 키우겠다”며 사재를 출연.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아주대를 인수한 뒤 투자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경영 신화’의 몰락으로 대우그룹이 해체된 이후에도 사재를 출연해 아주대 병원을 키워 더욱 그렇다. 김 전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했던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렀다. 거기서도 최근까지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 프로그램에 주력해 왔다.

한때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으로 우뚝 섰다가 외환위기 이후 부도덕한 경영자로 내몰리는 등 영욕의 세월을 살면서 많은 공과(功過)를 기록한 김 전회장. 섬유회사 영업사원이던 1967년 만 30세에 대우를 창업, 10년 만에 재계 4위에 올려 놓았다. 이후 1999년 해체 직전까지 국내에서 자산규모 기준으로 현대에 이어 2위그룹으로 키워냈다. 1998년 대우의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우리나라 수출총액 1323억달러중 약 14%나 됐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이 공중 분해되면서 김 전회장의 신화는 거기까지였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그가 지난 9일 아주대병원에서 8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정준성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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