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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마르셀 뒤샹의 분신, 에로스 셀라비

 

10여 년 전 러시아 체홉 페스티벌 극장에서 제작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가 LG아트홀에서 상연된 적이 있었다.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상연되는 동안 몇 번이나 폭소를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작품을 보고 난 이후 종종 이 작품을 되새기곤 했는데, 그건 이 작품이 선사했던 후련한 느낌 때문이었다. 몇 쌍의 커플들이 엇갈림을 반복하다 이내 제 짝을 찾아가는 과정이 전형적인 해피엔딩의 스토리이다. 그런데 러시아 체홉 페스티벌이 제작한 <십이야>에서는 러브 스토리에 필수적인 여배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출연한 모든 배우가 남성 배우들이었다. 일부 배우들이 여성 분장을 한 후 여성의 역할을 소화했던 것이었다.

동성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 연기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여성으로 분장한 남자 배우들이 사랑에 빠진 각양각색의 여성들을 얼마나 그럴싸하게 표현했는지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도 동성 배우들끼리의 사랑 연기에는 긴장감이 없어서 바라보기가 편안했다. 그때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켜면 등장하는 허다한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 필자가 피로를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종종 상대를 향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십이야>에서도 여성 배역이 상대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애정 공세를 펼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때 이 여성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는 헐크가 옷을 찢고 폭주하듯 여성이라는 배역을 찢고 나와 남성적인 육성과 몸짓을 보여준다. 민소매 드레스 차림의 배우의 팔에서 울근불근 팔 근육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배우의 천연덕스럽고 유연한 연기가 그렇게 재미있었고, 또 후련했다. 배우들은 원작의 맛을 참으로 잘 살렸다. 버지니아 울프가 셰익스피어를 일컬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진정한 자유를 구현한 작가라고 극찬했듯이, 셰익스피어 역시 극중 인물들이 통념을 뛰어넘기를 원했었다.

현대작가 마르셀 뒤샹 역시 여성의 분장을 한 적이 있었다. 갸름하고 곱상한 얼굴을 가진 작가에게 여성 분장은 썩 잘 어울렸다. 게다가 새침한 표정까지 그럴싸했다! 그의 동료 만레이는 여장한 마르셀 뒤샹의 모습을 촬영했고 뒤샹은 그녀에게 ‘에로스 셀라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뒤샹은 단순히 여장을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작업은 뒤샹 안에 내재한 여성적인 면모를 밖으로 드러낸 작업이었다. 뒤샹은 ‘에로스 셀라비’가 자신의 분신이며, 매우 지적이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여성이라고 했다. 그녀는 수려한 자신의 모습을 관객 앞에 드러내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존재였다. 뒤샹은 작품이 완성된 지 한참이 지난 이후에도 종종 에로스 셀라비가 여전히 자신 안에 살아있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종종 비평가나 전기 작가들은 마르셀 뒤샹이 여성 혐오를 지닌 인물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뒤샹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작가이다. 성에 관한 주제에서라면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경계심과 장애를 그도 겪었을 것이고, 그의 여러 작품에서 그러한 정서는 잘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에로스 셀라비’라는 분신을 자기 안에서 꺼내어 드러냈을 때 그는 이미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는 놀이는 공감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나리자의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었던 <L.H.O.O.Q.>라는 작품도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유희였다. <모나리자>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그림 속 인물이 남성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나리자는 여성과 남성을 초월한 무한의 존재이기도 하다. 다빈치가 그를 완벽한 존재로 그리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뒤샹은<L.H.O.O.Q.>라는 개그를 통해 남성과 여성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최근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이 화제이다. 극중 김지영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에 부딪치며 겪었던 좌절이 많은 독자들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켰다. 필자는 그들이 느끼는 좌절과 십여 년 전 보았던 연극을 통해서 느꼈던 후련함을 떠올렸다. 그리고 뒤샹의 분신 ‘에로스 셀라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의 김지영들에게 후련함을 선사할 수 있는 해법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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