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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슬칼럼]아이러니로 세상 읽기

 

 

 

우리는 일생을 전진한다, / 내내 앞만 바라보고, / 뒤에 있는 것은 두려워 알려하지 않는다.

우린 모두 이름 없는 자들, / 우린 말이라 불릴 뿐이지.

울지도 마라, / 웃지도 마라, / 침묵을 지켜라, / 듣기만 해라, / 주는 대로 먹어라, / 명령하는 대로 가라, / 그런데 우린 누구 하나 똑똑하지 못하다.

왕의 말이었던 자는 / 고위직을 차지하고, / 공주의 말이었던 자는 / 황금 안장에 앉고, 농부의 말이었던 자는 / 지푸라기 안장에 앉았지. / 그들에게 불복했던 자는 / 항시 밖에서 잠잤지.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 우리는 말로 남으리! (“Horses” 「말들」 전문)



21행의 위 시는 1990년 당시 알바니아의 공산주의를 고발하는 시이다. 무명의 25세 청년 시인 잭 마리나이(Gjeke Marinaj)가 발표하여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이 때문에 당국의 감시를 피해 국경을 넘어 미국 시민이 된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미 40여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폭넓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발칸에 대한 깊은 관심의 반영인 평화와 인류애에 기반한 그의 독보적인 이론 ‘프로토니즘’은 그를 일약 세계 최고의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말’(horses)은 다의성을 갖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전차를 끄는 ‘말’은 하늘을 날기도 하는 에너지의 상징이다. 그러나 현실의 ‘말’은 주인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봉사와 희생의 상징이다. 이 시에서 ‘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면 앞도 보고 뒤도 돌아보면서 다양한 시각에서 세계를 이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말’은 저주받은 죄수처럼 자유의지가 없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개별성을 상실해 이름조차 없는 수많은 ‘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은 이제 ‘말’의 숙명과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말’은 웃을 수도 울 수도, 말할 수도 없으며 주는 대로 먹고 명령하는 대로 가며 오직 침묵을 지켜야 할 뿐이다. 바보들의 군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말’의 세계에도 위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의 ‘말’은 신화의 ‘말’처럼 하늘 높이 날아오를 것 같지만 그래도 ‘말’일 뿐이다. 공주의 ‘말’과 농부의 ‘말’ 역시 안장은 천지 차이지만 ‘말’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문제는 말을 듣지 않는 ‘말’이 쫓겨나듯,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직위 여하를 막론하고 그 세계에서 추방된다. 당시 수많은 알바니아인들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추방되었던 실상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며, 이는 물론 시인 자신의 숙명의 환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 우리는 ‘말’로 남으리!”라는 마지막 시행은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아이러니는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수사적 장치이다. 그렇다. 그들은 ‘인간과 더불어’ ‘말’로 남을 것이다. 교묘하게 전체주의를 표방하며 은밀하게 그 길을 향해 가려는 자들을 생각해보자.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인간을 ‘말’로 길들여 그들의 목표를 성취하려 해도 인간을 ‘말’로 길들이려는 그들을 과연 안전할까? 그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적 상징에 의해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무한의 속도로 달리고 싶어 하는 그들의 욕망이 극대화될 때 그들은 자신이 길들이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말’과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죽음에 이른다. 인간성을 상실하고 인간을 표방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깨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더 크고 더 위험한 자멸적 전체주의’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이 조종하는 ‘말’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는 것처럼, 최고 권력자는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중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기대와 결과가 어긋나는 극적 아이러니의 힘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시대를 초월한 절대 권력의 숙명을 꿰뚫어보는 예언적 목소리가 새롭게 평가받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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