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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욱하게 안개가 낀 아침이었다. 강변을 눈앞에 둔 우리 집은 때때로 이런 짙은 안개가 새벽을 드리웠다.

출근 시간이 되었다. 나는 신발장 앞에 섰다. 여러 켤레의 구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중의 하나를 골랐다. 유난히 사연 많은 구두였다. 그 많은 사연을 안고 나는 이 구두를 신고 이곳 저곳을 나다녔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래 된 구두를 버리지 못했다.

나는 숄더백을 메고 그 낡은 구두를 신었다. 마침 현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누굴까? 이 안개 짙은 아침에… 나는 의문을 품고 대문을 열었다.

허름한 늙고 깡마른 한 노인이 안개 속에 서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턱수염이 더부룩한 노인이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구두를 닦으러 왔소.”

노인은 의외로 당당하였다. 목소리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서려 있었다. 나는 무엇에 끌린 듯이 노인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마침 화단 앞에 간이의자가 보였다. 나는 그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면 괜찮겠어요?”

노인은 말라비틀어진 얼굴에 은근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안개 속으로 그 남루한 노인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다. 낡은 점퍼 차림에 구레나룻이 어지러웠다. 까맣게 탄 얼굴에 유난히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였다. 언젠가 찾아간 어느 섬나라에서 본 낯선 이국의 비렁뱅이 같았다.

나는 의자에 앉았고 노인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뼈마디가 드러난 손으로 도구함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꺼냈다. 망가진 구둣솔에 지저분한 헝겊과 유약들이 차례로 나왔다. 노인은 헝겊과 구두약을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헝겊을 감아쥐고 조심스럽게 구두약을 발랐다. 노인의 한 손이 슬그머니 내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어떻게 날 찾게 되었어요?”

“나에겐 더듬이 같은 게 있소. 부인이 구두를 닦아야 한다는 건 저 안개로 알 수 있소.”

“안개?”

“그렇소. 안개엔 숨겨진 사연이 많소. 이 구두처럼….”

“그 구두에 사연이 많다는 건 어떻게 알아요?”

“평생을 닦아온 구두니까. 구두를 보면 그 사람의 인생역정을 알게 된다오.”

“인생역정?”

“필시…. 이건 선물 받은 구두죠.”

나는 대답을 못 했다.

“그때부터 부인은 굴레에 갇혔소. 이제 이 구두를 벗으시오.”

“왜요?”

“그래야 부인은 그 굴레에서 벗어날 거요. 그만큼 바동거렸으면 됐지 않소.”

나는 문득 목이 메었다. 그렇다. 이 구두에는 하고많은 사연이 매달렸다. 그 많은 사연들을 안고 이 구두는 묵묵히 천지사방을 나돌았다. 내 가슴 속에 숨겨진 그 많은 사연들을 진정 이 노인은 알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인의 손이 멎었다. 그는 일어났다.

“안개는 곧 걷힐 거요. 허나 날이 새면 또 다른 안개가 몰려올 거요.”

나는 대답 대신 노인에게 돈을 주었다. 노인은 돌아섰다. 그리고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귀신에게 싸잡힌 듯한 기분이었다. 정신이 멍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저 눈앞의 안개처럼 어쩌면 두고두고 저 깊은 안개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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