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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밥 한 번 먹자”

 

 

 

“정말 오랜만이지? 우리 밥 한 번 먹자.”

참으로 오랜만에 전화로 들어보는 친구의 음성은 상기된 듯 낭창거리고 있었다. 어린 날의 추억을 함께 품은 친구였기에 소식 뜸한 동안에도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그렇게 한 삼십 분을 떠들다 전화를 끊은 친구가 열흘이 지난 오늘 ‘평택역’이란다. 정말 한 이십 년 만에 밥 한 번 먹게 되는 것이다.

미리 도착한 커피숍, 키 낮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아기자기한 조명등 사이로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날, 청송에서 포항에서 부모를 떠나 공부를 하러 온 객지. 나는 혼자였지만 친구는 오빠내외와 조카들까지 함께 살고 있어서 오순도순 잘 지냈다. 나는 늘 왁자한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아마도 그 때마다 고향에 두고 온 남매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간절히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시누이의 친구까지 드나들었으니 친구의 올케가 오죽 귀찮았을까 싶어 새삼 얼굴이 붉어지긴 하지만 그 때는 참 눈치도 없이 해맑게 드나들었던 것 같다.

계산 없이 정을 줄줄만 알았던 친구가 어느 날부터 학교를 며칠씩이나 빠졌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오빠 내외가 받는 전화가 어려워 달리 연락을 할 줄도 모르고 결국, 일요일 친구 집에 찾아갔다.

“심장 판막증이래. 한동안 학교에 못갈 것 같아.”

응급으로 큰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친구도 못 만나고 친구 올케가 전해주는 말만 듣고 돌아오는 길, 나는 비오는 골목을 우산도 없이 뛰어 도서관에 들렀었다. 의학상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백과사전에서 찾아본 ‘심장판막증’이 얼마나 무서운 병으로 느껴졌었는지 비 맞으며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던 것 같다.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을 잉태할 수도 있다는 듯. 끝인 줄 알았던 친구가 얼마 후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를 다시 나오게 되고 무사히 졸업을 하고 취직도 했던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치료하는 힘든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절망의 나락 어디쯤엔 희망이라는 끈 하나쯤 반드시 드리워져있다는 말을 나는 그 날 이후 습관처럼 되뇌곤 했다. 그 후 우리는 간혹 시내에서 맥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빵집도 들르고 영화도 보았다. 틈틈이 음악다방에서 좋아하는 음악도 뮤직비디오도 신청해 듣곤 했다. 우리의 젊음은 그렇게 추억 속으로 밤 그림자처럼 침잠해 들고 쥐죽은 듯 각자의 삶을 살아내곤 했었는데.

깊은 계곡과도 같은 시간을 건너 참으로 오랜만에 ‘밥 한 번 먹자’는 친구가 들어섰다. 창밖은 금방이라도 눈이 오려는지 잔뜩 흐려져 있었다. 친구가 입은 오렌지색 펄이 뿌려진 코트가 눈에 띄게 화사했다. 연한 자줏빛으로 살짝 염색한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소녀처럼 배시시 웃음을 흘리던 친구가 뜬금없이.

“나 이제 혼자다. 이제야 너한테도 놀러 올 수 있게 되었다고.”

말끝에 힘을 주며 친구는 눈물을 그렁그렁 자아냈다. 순간, 빙그르르 돌다 흐르는 내 눈물을 굳이 닦고 싶지가 않았다. 마주잡은 손으로도 느낄 수 있는 친구의 감정과 눈빛만으로도 그동안의 마음이 충분히 전이되고 힘내자는 두 마음이 합해질 뿐 딱히 할 말이 없다.

그저, 절망의 나락 어디쯤 진을 치고 있을 희망이 떠올랐을 뿐

앞으로,

“우리 밥 한 번 먹자”는 말,

더 자주 하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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