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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의 향기]저 매화분에 물 주거라 - 퇴계 매화시첩

 

 

 

 

 

퇴계의 『매화시첩(梅花詩帖)』은 그가 남긴 100수가 넘는 매화시 가운데 62제(題) 91수(首)를 자신이 직접 선별하여 따로 묶은 역사상 유일한 매화 시집이다. 이 시첩에는 주로 퇴계가 중년 이후에 쓴 작품부터 타계하던 해인 70세 때까지 쓴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퇴계는 특히 매화에 관한 시를 많이 썼을 뿐만 아니라 매화를 각별하게 사랑했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평소에 매화를 매선(梅仙)이라 부르고 또 매형(梅兄), 매군(梅君)으로 의인화하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매화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하다. 이렇게 끔찍이도 매화를 사랑한 데에는 물론 매화의 고고한 선비적 풍모를 경외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퇴계의 매화 사랑에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가 바로 두향(杜香)과의 애절한 사연이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마흔 여덟살 때인데, 첫 부인에 이어 둘째 부인과 사별하고 아들까지 잃은 슬픔 속에서 퇴계는 두향을 만났다. 두향은 비록 관기(官妓)였으나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했고 매화를 좋아하고 분매(盆梅) 솜씨가 좋았다. 당시 두향은 18살이었고 퇴계와는 30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었으나 두 사람은 신분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는 연분을 나누었다. 때로는 스승과 제자처럼, 때로는 부녀처럼, 또는 연인처럼. 그러나 만난지 9개월만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전직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태산 같던 성리학자 퇴계도 두향 앞에선 뜨거운 인간이었음은 이별하기 전날 밤 퇴계의 한마디에서 알 수 있다.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움 뿐이다.” 이에 두향은 말없이 먹을 갈아 시 한 수를 썼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어/어느듯 술 다 하고 님마져 가는구나/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하나

두향의 눈물이 번진 화선지에 퇴계가 답시를 썼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사별기탄성死別己呑聲)/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 (생별상측측生別常惻測)

당시의 관료규정이 엄하여 임지로 관기를 데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같이 할 수 없는 운명임을 두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떠나는 퇴계의 짐꾸러미 속에는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분이 들어 있었다.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새로 부임해온 군수에게 자신을 기적(妓籍)에서 삭제해 달라고 청했다. 두향은 기녀에서 자유인이 되었으나 퇴계와 자주 찾았던 남한강가에 움막을 짓고 평생토록 퇴계에 대한 단심을 품고 살았다. 헤어진 지 21년을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향은 퇴계의 부음을 듣고 안동을 찾아가 한사람이 죽은 후에야 만나게 된 것이다. 다시 단양으로 돌아온 두향은 결국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남한강변 강선대 근처에 있는 두향의 묘에 퇴계 후손들이 벌초하고 관리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기문총화(記聞叢話)』와 『단양 향토지』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때 두향이 주었던 매화는 퇴계가 평생 살아 있는 인격체를 대하듯 가까이 두고 경(敬)과 정(情)을 쏟았다. 퇴계의 임종을 지켰던 애제자 이덕홍이 쓴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에는 “선생께서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유언으로 12월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게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初八日 命灌盆梅)”고 기록되어 있다. 그 매화는 지금도 도산매(陶山梅) 또는 퇴계매(退溪梅)로 불리며 대(代)를 잇고 이어 도산서원 뜰에 그대로 피고 있다.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좇아오네/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겨울 축제가 모두 취소될 만큼 지난겨울은 이상기온이 계속되기도 했거니와 입춘이 다가오니 벌써 남녘에선 매화의 개화 소식이 들려온다. 비록 설중매를 볼 기대는 없어졌지만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산서원 앞마당에는 두향과 퇴계의 애절했던 사랑꽃이 만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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