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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아이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기준점

 

 

 

연대를 표현할 때 서양은 BC와 AD를 쓴다. 그리스도 탄생을 전후로 기원전과 기원후로 나눈다. 그리스도 탄생이 그 기준점이다. 내 역사에도 기준점이 되는 지점이 있다.

섣달그믐 무렵이면 부엌은 부산했다. 아궁이에선 장작불이 타고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솟아올랐다. 엄마와 할머니는 며칠 전부터 수정과며 식혜를 만들고 만두를 빚느라 종종걸음을 쳤다. 2㎞가 되는 길을 걸어 방앗간에서 가래떡도 빼왔다.

종일 언 논에서 썰매를 지치던 동생들은 무릎이며 바짓단이 푹 젖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흙이며 지푸라기를 묻히고 얼굴은 빨갛게 얼어서. 그리고는 꽁꽁 언 다리를 아랫목 이불에 집어넣고 앉아 강정을 먹거나 얼음 낀 차디찬 식혜를 받아먹었다.

매년 설은 추운 날을 잡아서 돌아왔다. 코끝이 찡하게 얼어붙을 것 같은 매운 날만 골랐다. 처마의 고드름도 가장 길게 늘어지는 겨울의 강심. 그 한복판에 낀 설. 눈밭에 떨어진 귤처럼 달력에도 내리 사나흘 빨간색으로 설 연휴가 끼어 있었다.

설 아침에는 늘 고민을 했다. 차례가 끝나면 제사상에 놓인 음식 중에서 무엇부터 먹을까가 나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곶감, 옥춘사탕, 약과, 젤리. 어느 것 하나 뒤로 세워놓을 수 없었다. 최종적으로는 약과와 젤리 중에서 망설였다.

내겐 그 고민이 아주 중요했다. 위장은 한정되었기에 신중해야 했다. 우선순위를 정해놓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가는 배가 불러 나름 정해놓은 맛있는 음식을 맛보지 못할 수도 있었다. 떡국도 좋아하지만 먹다가 배부르면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나중으로 밀어놓았다.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을 먼저 먹고 그 다음 순으로 먹어야 후회하지 않는 설날 아침이 되었다. 이것은 지금도 애용하는 방법이다. 과일 선물이 들어오면 상자를 열어 크고 예쁜 것부터 먹는다. 밥을 하면 찬밥이 남아도 새로 한 밥을 먼저 먹는다. 가장 맛있을 때 최고 좋은 것을 먼저 먹는 것이 음식을 먹는 나의 법칙이다.

머릿속으로 먹는 순서를 정하는 것은 즐거운 고민이었다. 먹는 즐거움을 눈앞에 두고 맛있는 것들의 순위를 매기는 일은 논리적 타당성을 고려하는 세심한 작업이었다. 당도는 어느 것이 더 좋은지, 입에 들어갔을 때의 만족도라든지, 안 먹었을 경우에 감수해야 되는 것까지 꼼꼼히 따져보며 하는 선택이었다.

차례를 지내는 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 숟가락을 세 번 탕탕탕 구르고 떡국에 올려놓는 그 몇 초, 절을 하는 그 몇 분. 제기에 술을 따라서 향 위에서 빙 돌린 후 상에 올리는 아버지의 손. 그 손을 눈으로 따라가며 언제쯤 끝날지를 속으로 셈하였다. 반들반들 까맣게 닳아버린 문지방 너머로 며칠 전 내린 눈이 하얗게 반사되는 그 시간은 길고 길었다.

이제는 설날이 되어도 설레지 않는다. 추석도 크리스마스도 그때의 설렘과 같은 질의 즐거움은 다시 맛볼 수 없었다. 언제였더라. 약과부터인지, 젤리부터인지를 놓고 고민하지 않던 것이.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약과부터 손에 쥐는 행동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제사상을 차리는 주체가 될 때부터였을 것이다. 결혼하고 처음 시댁에서 치르는 명절. 새벽부터 부엌에서 일하면서, 바닥에 한자세로 앉아 나는 먹지도 않을 전을 부치면서, 찬물에 손을 담그면서 나는 어딘가를 지나고 있었다. 손끝의 냉기가 머리로 가면서 이런 통점을 지나가야 어른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문이었다.

내 역사에서 아이와 어른을 나누는 기준점. 그것은 제사 음식의 먹는 순서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된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산다는 것이 먹는 것의 우선순위를 가리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잃는다는 것을, 그리고 약과와 젤리 사이에서 다시는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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