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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비움의 미학

 

 

 

냉장고 파먹기 중이다. 꽉 찬 냉동고에 검은 봉지, 흰 봉지 언제 넣었는지 물기가 말라 푸석해진 생선까지 수북하다. 세일할 때 사다 놓은 것들이다.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싼 생선이나 육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사게 된다. 한두 번 먹고 냉동고에 들어간 것은 쉬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먹고 남은 음식을 버리지 못하고 쟁여놓기 때문에 이런 저런 것들로 냉동고가 빼곡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꺼내 먹다보니 안쪽 깊숙이 들어간 재료는 유통기한을 넘기게 되고 결국엔 버리게 된다. 살 때 돈 들이고 버릴 때 돈 들이고 살림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자신을 타박하며 반성하지만 얼마간 지나면 또 가득 찬다.

밥을 버리면 죽어서 버린 만큼의 밥을 먹게 된다며 밥이나 음식 버리는 것을 엄하게 꾸짖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버릴 것도 없었고 또한 가축들 먹이로 사용하다보니 밥풀하나 과일 껍질 하나 버려지지 않던 살림이었다.

지금은 먹거리가 풍족해졌고 생활수준도 예전에 비할 바 없이 좋아졌으니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게 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세상이 됐지만 불과 수십 전만 해도 조반석죽하는 이웃이 있었다. 아침에 밥 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엔 죽을 먹는다는 것처럼 아침엔 보리밥 먹고 점심은 굶고 저녁은 국수 먹으며 여러 자식들 키우고 공부시키며 허리띠 졸라매고 산 세대가 바로 우리 윗세대 부모님이시니 그런 면에서는 우리는 축복받은 세대다.

먹거리 홍수로 인해 비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복부 비만 등 합병증 유발로 식단조절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는 요즘과는 달리 봄 되면 새순 뜯어다 양푼 가득 나물해서 푸성귀 반 곡식 반으로 밥상을 차렸고 미꾸라지며 피라미 잡아다 어죽을 끓여 몇 끼씩 때우곤 하던 때가 소박하지만 건강한 밥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처럼 살기는 힘들지만 며칠 시장을 보지 않고 냉장고 음식으로 밥상을 차리고 있다. 제철에 삶아놓은 나물이며 선물로 들어온 떡 그리고 사골 고아놓은 것 등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시장보기도 불편한 요즘 잘 됐다 싶다.

세탁기가 고장 나서 교체하면서 세탁실을 정리했다. 뭐가 그리 많은지 효소열풍이 불었을 때 담가놓은 과즙들로 꽉차있던 것이며 겨우내 먹고 남은 감자, 양파 등을 치우니 왠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내친 김에 대청소를 시작했다. 옷장에 넘쳐나는 옷가지들과 몇 년째 펴보지도 않은 이불이며 이런저런 사용하는 않는 것이 더 많다. 버리기엔 아깝고 두기엔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집의 주인이 물품이고 내가 그 안에 세 들어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다. 서랍 하나씩을 정리하고 있다. 버리기 아까워 여전히 망설이고 있지만 용기를 내어 줄여나가고 있다. 뭔가 찾으려면 한참 뒤적이던 것이 한 눈에 들어오니 내 안의 비만 층을 덜어내고 있는 것 같아 가볍다.

이렇게 물욕을 줄여 나가고 있다. 미니멀 라이프라기엔 아직 멀었지만 천천히 실천해볼 참이다. 비우고 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기만 했었다. 냉장고도 비우고 옷장도 정리하고 비워지는 만큼 마음의 여유를 생긴다는 것을 배웠다.

뭐든 많은 것이 좋았고 꽉꽉 채우면 흐뭇했는데 이젠 비우고 싶다. 공간과 공간사이 나를 들여놓고 여백이 주는 편안함에 길들여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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