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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誠愛칼럼]다산(茶山) 부부의 사랑

 

 

 

“집을 옮겨 남쪽으로 내려가/끼니라도 챙겨드리고 싶으나/한 해가 저물도록 병이 깊어져/이내 박한 운명 어쩌리까/이 애절한 그리움을/천리 밖에서 알아주실는지.”

다산 정약용의 부인인 홍혜완이 1807년 겨울 강진의 다산에게 보낸 시다.

홍화보의 외동딸인 혜완은 한양의 남산골에서 나서 곱게 자란 서울 아가씨였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의 비서관이라 할 수 있는 동부승지 집안였던 반면 다산의 집안은 다산의 5대조부터는 남인에 대한 박대로 3대째 벼슬을 하지 못한 몰락한 양반가다.

다산의 유배시절 부인은 애절한 사랑의 증표로 신혼시절 붉은 치마를 보내준다. 다산은 가위와 다리미를 구해 치마를 작은 책자를 만들기에 알맞은 크기로 재단해서 자르고, 반듯하게 다림질을 했다. 이어 치마 조각을 한지에 붙이고는 틈틈이 아들들에게 주는 글을 비단에 적었다. 그 대표적인 글이 근검이라는 두 글자였고 “경직의방(敬直義方·공경으로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행동을 반듯하게 하라)”이라는 말이었다. 다산은 이를 하피첩이라 이름 지었다. 자녀들을 위한 글과 시를 썼지만 부인의 치마를 정성스레 가위질하고 책으로 재현해낸 뜻에는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은 아들에게 하피첩을 남기고 딸을 위해서도 애틋한 마음을 알렸지만 아내를 위해서는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 방이 따뜻한지 살피고,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고, 부드러운 낯빛으로 대하라”는 당부만 할 뿐이었다.

다산이 한밤중 한 여인이 찾아와 희롱한 꿈을 꾸고 잠시 잠깐 마음이 동한 것을 경계해서 쓴 시가 있다. “눈 온 산 깊은 곳에 한 가지 꽃이 피니/붉은 깁에 둘러싸인 복사꽃보다 낫다/이 마음은 금강의 쇳덩이로 되었나니/풍로가 있다 한들 네가 나를 어이하리” 부인에 대한 사랑을 다산은 “금강의 쇳덩이”라는 결연한 의지로 담아내었던 것이다.

다산은 6남 3녀를 두었지만 4남2녀를 천연두·학질·조산 등으로 잃었다. 학질에 걸려 8개월 만에 낳은 첫딸은 출산 4일 만에 죽어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셋째 아들(구장)은 만 2살이 겨우 지나, 둘째딸(효순)과 넷째아들(삼동)은 모두 22개월 만에 천연두를 앓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다섯째 아들 역시 태어난 지 10여일 만에 이름도 짓기 전에 죽었다. 특히 강진 유배 후 1년이 지난 1802년(순조 2년) 들려온 4살 막내아들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배지의 아버지는 ‘아비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산은 더욱 큰 충격에 빠졌을 아내를 걱정했고 너희는 모쪼록 마음을 다해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해서 어머니 목숨을 보전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유배기간 동안 관료로서는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 등 그 주요 저서 대부분을 이 시기에 저술하였다. 최악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다산이 과연 이런 빛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더욱이 빛난 것은 가장이나 남편으로서의 소임을 다해주었다는 것이다.

다산 부부의 사랑으로 연결된 하피첩과 애절함은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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