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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봄의 조향사

 

 

 

봄은 퍼즐이다. 꽃눈은 가지에 끼워지고 골짜기를 나온 물은 들판으로 끼워진다. 새는 나무에 분홍 발목을 끼우고 맑고 높은 소리를 공중으로 끼워 맞춘다. 봄의 각본대로.

이때쯤 조향사는 바쁘다. 흔히 아는 향수 브랜드의 조향사가 아니다. 샤넬이나 디올도, 조말론이나 불가리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고용되지 않은, 인공의 어떤 것도 불허하지 않는 자연의 조향사다. 매년 봄의 초입에 간판을 걸었다가 꽃이 지면 간판을 내린다.

조향사는 예민하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봄의 향연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온도가 조금만 내려가도 개업이 늦춰지는 봄의 특성상 바람에게 단단히 주의를 당부한다. 3월에는 한발 한발 서두르지 말고 안단티노로, 4월에는 적당한 온도의 알레그레토로 오라고. 가끔 조절을 못해 꽃잎이 얼어버리는 일도 있으니.

향을 빚을 땐 1밀리리터의 오차도 없어야 한다. 봄 시즌 한정판은 늘 긴장 하라고. 공급물량 부족으로 주문수요를 감당 못할 수도 있으니 눈 똑바로 뜨고 있으라고 말이다. 잠깐 한 눈 팔다간 봄이 금방 소진 되므로.

마수걸이가 좋아야 다음 품목도 히트 친다. 프리지아는 이른 봄만큼 상큼하고 화사한 향을 준다. 졸업시즌부터 출하되는 인기 품목이다. 지중해가 고향인 히아신스에게도 진한 향을 준다. 태평양의 바람 한 줄기와 지리산의 햇살 한 줌도 조심스럽게 접어 넣는다.

매화는 고고한 향을 준다. 은은하면서도 멀리 가는 향. 가을부터 꽃눈을 만들고 겨우내 보살핀 만큼 노고와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다. 특히 홍매의 향은 일품이다. 진분홍 꽃잎에서 뿜는 고혹적인 향에 눈보다 코가 먼저 달려간다.

그윽한 향을 준 목련에게는 마지막까지 기다리라 주문한다. 일제히 다 필 때까지는 절대로 떨어뜨리지 말라고. 나무에 있을 때가 향의 절정이라고. 꽃이 지면 절정도 끝나고 문도 닫는다. 목련은 그 며칠을 위해 일 년을 기다린다.

목련이 지는 것은 아프다. 커다란 꽃이 떨어지는 것은 가슴이 무너지는 일이다. 뭉텅 송이 째 쏟아진다. 목련이 그렇고 동백이 그러하다. 봄은 그들의 낙화에 손 한 번 쓰지 못한다.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보낸 사랑도 봄에 목을 떨어뜨렸다. 붙잡고 싶은 것은 빠르게 졌다. 목련이 지듯.

벚꽃은 예약이 폭주했다. 환상적으로 피고 처연하게 지는 효자 매출 품목이다. 향은 약해도 화사한 자태는 봄의 여신으로서 손색이 없다. 벚꽃의 생명은 일시에 피고 일제히 지는 것이라고 바람과의 협업을 강조한다. 조향사의 지시에 벚꽃은 한 날 한 시를 맹세한다. 올해도 체리블러썸이 유행이겠다. 라일락에게 줄 보랏빛 향이 좀 더 필요하다. 봄날의 기억 한 줌 불러 올 바람처럼 아련한 향.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라일락만을 위한 향을 준비한다. 마진율 높은 향에 코가 꿰어 눈이 멀겠다.

개나리와 민들레도 향을 달라고 조른다. 매화나 목련, 라일락만 향을 독점한다고 항의가 빗발친다. 하지만 조향사에게도 나름의 기준이 있다. 향을 준 꽃들은 단명하지만 향을 주지 않은 꽃에게는 향 대신 오래도록 많은 꽃을 품도록 했다. 그러나 매 해마다 개나리는 골이 나서 가지 가득 툭툭 불만을 터트리고 마당발 민들레도 아무데나 영토를 넓혀 보도블록이나 시멘트 틈에도 꽃을 피웠다.

우려스러운 것은 미세먼지다. 아무리 향을 정성스레 조합해도 훼방꾼이 오면 말짱 허사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많은 꽃을 피우겠다고 손익계산을 하는 조향사. 몇 차례 조용한 비가 내려주고 미세먼지만 덜하다면 올 봄, 매출이 쏠쏠하겠다. 5월에는 재고 없이 한 몫 챙겨 손 털고 가겠다.

봄이 오면 쇼핑하러 가야겠다. 빛 고운 스카프 목에 두르고 향을 사러 나서야지. 먼 기억의 담장에 기대면 가슴을 두드리던 라일락 향을 구매할 수 있으려나. 온통 연보라 빛으로 다가오던 떨림을, 품절된 그 봄을 구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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