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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신발의 논리

 

 

 

 

 

현관을 나서며 나는 별 생각 없이 어제 신었던 신발을 또 신는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마지막 준비과정을 위해 몸에 장착하는 신발. 그 신발로 하여 나는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나를 확인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치 한 몸인 듯 내 몸에 붙어 다니며 지저분함으로부터 또는 차가움으로부터 때로는 통증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신발. 그 신발이 처음부터 그렇게 편안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갓 돌을 넘기고 있는 조카 ‘현’이의 작은 발에 신발을 신기자 금방 얼음처럼 몸이 굳어 꼼짝을 못한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신발을 이리저리 쥐어뜯기 시작하는 ‘현’이. 누구에게나 처음의 신발은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하지 않았을까 싶다. 마치, 사회의 일원으로 스며들기 위해 첫 발을 내딛던 그 날처럼 말이다. 처음의 어색함이 점점 익숙해지고 결국엔 한 몸인 듯 되어가는 ‘신발 길들이기’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마치 우리 삶과도 닮은 듯하다.

동대문 지하상가를 지나가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구두를 산 적이 있다. 벚꽃 만발하던 그 날, 나는 잔뜩 멋을 낸 치마를 입고 그 구두를 신었다. 그 날 그 여의도에는 폭죽처럼 꽃잎이 흩날렸고 늦도록 휘청거리는 바람과 더불어 활짝 핀 인파들이 몰려다녔지만 오후 내내 나만 절뚝거렸다. 발뒤꿈치의 통증과 피멍을 달래다 못해 끝내 맨발로 걸어야 했던 아픈 기억 속, 여전히 남아있는 친구의 한 마디 말.

“그것 봐, 신발도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야.”

그랬다. 신발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친해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마음 편하게 속내 드러낼 수 있는 친구가 되기까지. 초보 용접공이 고도의 용접기술을 보여주기까지, 신발의 뒤꿈치가 편안해지기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분명 필요했던 것이다. 그 단순한 ‘신발의 논리’조차 제대로 습득하지 못해 여전히 준비 없이 먼 길, 또는 큰일을 시작하려는 나를 보노라면 나이 든다고 다 철이 드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길들이기의 연습을 통해 충분히 내 신발이 되었을 때, 서로를 배려할 충분한 준비가 되었을 때, 먼 길을 편안하게 동행할 수 있다는 논리. 그 ‘신발의 논리’를 끝내 습득하지 못하고, 나 혼자 좋다고 함부로 시작했던 내 지난날의 인간관계는 끝끝내 삐걱거리고 절뚝거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켤레의 신발. 그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행사 때나 신게 되는 신발과 제철에 꺼내 몇 번 신다가 계절이 바뀌면 들여놓는 신발. 그리고 사시사철 습관처럼 신게 되는 편하고 익숙한 신발. 참으로 다양한 신발들이 있다. 그 다양한 신발이 제각각의 쓰임새를 갖고 내 곁에 머물러 있듯 내 주변의 관계들 또한 서로에 대한 각각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끈끈하게 얽혀있는 듯하다.

승강기에서나 가끔 마주치는 이웃이라도 그 나름대로 내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동료는 동료들대로, 오랜 친구는 그 친구들대로 구수한 곰국 같은 푸근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지금은 편안하게 얽히고설킨 나를 중심으로 한 그 모든 관계들이 처음부터 편안하고 익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모든 익숙함에도 ‘신발의 논리’가 적용되었는지 모른다. 마주칠 때마다 어느 한 쪽이 먼저 보여주는 환한 미소나 눈인사 또는 악수 한 번의 시작, 그런 은근한 연습의 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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