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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시골길을 걸으며

 

 

 

 

 

합천 땅에 내린 건 해질녘이었다. 노모가 계신 집은 합천읍에서도 한 시간 남짓 걸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모처럼 지는 해를 보며 남정강을 건너 걸어가기로 했다. 읍내를 벗어나자 보리밭이 보였다. 해거름 밭둑 길을 쉼 없이 걸었다.

보리밭을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이렇게 보리밭 길을 따라서 시골 초등학교를 다녔다. 간혹 친구들을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섬뜩한 두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였다. 우는 아이 소리 같기도 한, 밤하늘을 흔드는 늑대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늑대를 두고 소문도 흉흉하였다. 어느 동네에선 늑대가 갓난아기를 물고 갔다는 둥, 자고 나면 늑대가 돼지우리를 덮쳐 새끼돼지를 물고 갔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면 혼자 삽짝 밖을 나서지 못했다. 어쩌다 이웃 동네 친구를 만날 일이 생기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내어 무리를 지어 보리밭 고랑을 지나다녔다. 푸른 달빛 아래 보리밭 밭둑을 걷는 기분이라니…. 달빛 속의 밭고랑에서 불쑥 늑대가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에 우리는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런 늑대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다고 한다. 온 나라에 늑대 흔적이 없어졌단다. 멸종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늑대가 사라지니 늑대를 두고 들리던 이런저런 소리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저 적막강산에 밤이면 개 짖는 소리만 가끔 들린다.

뿌연 달빛을 벗 삼아 친구들과 가슴 조이며 걷던 보리밭 길이 그립다. 늑대가 두려워 뒷간 출입도 못 하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늑대 얘기가 사라진 세상이라니….

하지만 사라진 것이 어찌 늑대뿐인가? 그 흔하던 족제비도 사라지고 너구리도 보이지 않는다. 난데없이 산돼지와 고라니가 판을 친다. 늑대가 누리던 그 자리를 그들이 차지해 버렸다.

가난하던 그 시절, 그 어린 시절. 비록 누추하고 좁은 방에서 너나없이 없는 것이 불편하였지만, 사는 것은 맘이 따뜻하고 편하던 그때 그 시절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얼굴에 버짐을 달고 살면서도 곡식을 거둔 빈 논에서 자치기도 하고, 깡통 차기도 하고, 달빛 아래서 술래잡기하며 그저 즐거움이 넘쳐나던 그 시절이 새삼 나를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 흔적 떠난 지 오래된 빈집이 즐비한 마을은 적막하기 그지없고 가슴 아린 허전함이 밀려온다.

밤마실을 나서면 보리밭 사이로 검은 늑대 그림자가 수시로 눈에 띄던 그 늑대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밤이 오면 골짜기 그 어디선가 밤바람을 가르며 울부짖는 늑대 소리가 듣고 싶다. 이제 고향 땅 시골을 찾아도 늑대는커녕 인적조차 찾을 수가 없다. 노인들만 사는 마을엔 해만 지면 문을 걸어 잠그고 텔레비전만 보고 앉았다. 이웃집을 찾는 일도 없어지고 그저 기계장치 앞에서 번뜩이는 세상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만큼 내 가슴 속의 그들도 그리워진다. 행방조차 모르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 하늘나라로 떠나간 동네 어르신들, 밤이면 무성하던 도깨비 얘기들, 골목길을 지날 적마다 두런두런 들리던 천자문 읽는 소리들… 그 모두가 늑대 울음소리와 함께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운 흔적들이다.

아직도 마을에 도착하려면 산굽이 하나를 더 돌아가야 한다. 저물녘 보리밭 길을 하염없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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