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옛오늘제소리]개벽과 개혁 사이-최시형과 어윤중

 

1893년 봄, 충청도 보은군 장안골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장안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아이들이 “서울 장안이 장안인가 보은 장안이 장안이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보은 장안골 곳곳에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새긴 깃발이 휘날렸다.

집회를 소집한 해월 최시형(1827~1898)은 도인들에게 공중위생을 지키고, 음식을 조심하고, 청소를 철저히 할 것 같은 기본 수칙을 알려주고 잘 지키도록 했다. 수만 명이 모였으나 장안골에는 대소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땅을 파고 일을 본 뒤에 깨끗이 파묻었기 때문이다.

떡장수와 엿장수도 몰려들었다. 점심때가 되면 순식간에 광주리와 엿판이 비워졌다. 놀랍게도 광주리와 엿판에 놓고 간 돈을 계산하면 한 푼도 틀리지 않았다. 장사꾼들은 이후부터 떡 광주리와 엿판을 내려놓고 광주리가 비기를 기다리다가 돈만 거두어 갔다.

보은에 수만의 동학도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고종(1852~1919)은 호조판서 어윤중(1848~1896)을 양호선무사로 임명했다.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보은에서 성장한 어윤중은 보은 일대의 사정에 밝았다. 보은에 도착한 어윤중은 장안골로 모여드는 동학도들의 모습을 “물이 고랑에 흘러들고 불이 들판을 태우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어윤중은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지도부를 만났다. 자신들의 모임을 “민회(民會)”라 표현하는 동학지도부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30년 전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라는 것과 나라와 백성의 생존을 위협하는 서양오랑캐와 왜놈들을 물리치라는 것. 어윤중이 관대한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탐관오리를 파면하며 해산을 설득했다. 어윤중의 말을 신뢰한 최시형이 집회 해산을 결정했다. 보은집회 이후 동학도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검불 하나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해 여름에 콜레라가 전국에 크게 유행했으나 자주 씻고 깨끗하게 생활하던 동학도들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조정에 돌아간 어윤중은 동학도를 ‘민당(民黨)’이라 부르며 이들의 요구와 입장을 힘써 대변하여 관료와 양반들에게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도들에 대한 신뢰와 개혁에 대한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한해가 지난 갑오년(1894) 봄에 전봉준의 주도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정부와 협력하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협치를 통해 개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고종은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했다. 때를 기다리던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총공세를 폈으나 끝내 패하고 말았다. 같은 해 7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개화파를 앞세운 신정권을 수립하고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갑오경장이다. 이때 어윤중이 개혁의 실무를 맡았다. 그는 고종과 왕후 민씨의 요청도 거절하는 강직한 관료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어윤중은 농민들에게 가장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관료였다.

한편 최시형은 도망을 다니면서도 동학을 전파했다. “어린이와 여성과 노예를 자식같이 사랑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세상을 변화시켰다. 백만의 도인을 거느린 교주였으나 손수 짚신과 멍석을 짜서 생계를 꾸렸고 머무는 곳에는 나무를 심었다. 그러나 1898년 최시형은 결국 관헌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에게 사형을 언도한 재판관은 조병갑이다. 동학농민전쟁을 일어나게 만든 탐관오리를 재판관에 임명한 고종은 2년 전인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한 직후 ‘포살령’을 내려 개혁을 주도한 어윤중을 죽이도록 했다. 그럼에도 개벽과 개혁의 물줄기를 바꾸지 못했다.

1919년 4월 11일, 삼일운동의 힘으로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평등과 자유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장안골에 모였던 동학도들의 꿈과 우금치에서 쓰러져간 농민군의 피가 피워낸 꽃이다.

 









COVER STORY